2023년 가을, 이상한 청탁 메일이 나에게 날아왔다. 전라남도 나주에 대한 에세이를 써 달라는 일방적 청탁이었다. 나주라는 곳에 대한 나의 경험과 정서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은 채 무조건 장소를 지명하고 써달라는 청탁이라 다소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 기막혔던 건 내가 살아오면서 나주라는 곳엘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나주에 가본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청탁한 것인가, 기이한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잘못된 청탁이라 판단하고 청탁 사절 메일을 보내려 메일함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무엇이 있었다. 나에게 나주가 지정된 게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직감!
나는 청탁 사절 메일 쓰는 걸 미루고 이틀 동안 그 문제를 의식의 선반 위에 얹어 두었다. 그리고 그 이틀 동안 ‘증강현실 나주’라는 기이한 화두가 나에게 떨어졌다. 결국 나는 청탁을 수락했고, ‘증강현실 나주’라는 화두만 품고 난생처음 나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실제적인 증강현실을 경험하며 이 소설의 영감을 통으로 얻었다. 완성된 소설을 거저 받아들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감이 떠오르는 순간 소설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이미 완성된 작품을 채록한 정도라고 할까.
소설을 완성한 새벽, 알 수 없는 에너지에 사로잡혀 한동안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그리도 절실하고 절박하고 안타까웠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아픔이 나에게 완전하게 전이돼 오열을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완전한 감정이입과 거리두기 사이의 긴장과 스트레스, 그것이 소설을 완성하고 난 뒤에 격하게 터져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려나 기이한 경로로 얻게 된 소설이라 소중하고 각별한 애정을 느낀다.
어제 너는 나주 향교 주차장에서부터 시작했으나 내가 사십 분 넘게 걸어서 당도한 곳은 나주 향교 외삼문 앞이다. ‘羅州鄕校(나주향교)’와 ‘大小人員皆下馬(대소인원개하마,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리시오)’라고 쓰인 빗돌이 서로 어긋난 방향으로 서서 빗물에 젖고 있다.
거기서부터 향교길이 시작된다. 어제와 달리 그 길에서 기이한 정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어제 너와 함께 들어간 주차장 옆 작은 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뒤부터 이상한 기류가 엄습한다. 대성전을 거치고 명륜당 앞에 섰을 때, 그리고 기숙사로 사용하던 서재와 동재 앞에 섰을 때 나는 명치 끝이 딱딱해지고 어깨가 짓눌리는 느낌을 이기지 못해 뛰듯이 대문을 빠져나온다. 정신이 혼미하다.
골목 중간쯤에 서서 낮은 담장 너머로 동재와 서재, 그리고 명륜당을 다시 눈여겨본다. 지금 비 내리는 나주 위에 십 대인 너와 내가 겹치고, 저 동재와 서재의 어느 방에선가 바지춤을 끌어내리고 함께 뒹구는 너와 내가 보인다. 하지만 남녀가 아니라 남남으로서 그런 관계가 파국을 맞이하는 장면에는 너무 깊은 상처가 아로새겨져 파동이 극심하다. 내가 다른 유생과 친해진 걸 시기하고 질투한 네가 관아에 나를 추행범으로 고발함으로써 나는 향교에서 내쳐지고 우리 집안은 얼굴 들고 살 수 없다하여 한양으로 떠나게 된다.
멀리서 떠나는 나를 독한 눈매로 지켜보던 네가 되살아난다. 그걸 더 이상 마주하기 어려워 나는 서둘러 향교 골목길을 빠져나온다. 증강현실은 좀체 잦아들지 않고 금성관이 가까워질 때까지 너와 나의 향교 시절은 파동이 극심한 상태로 재현된다. 너무 걸어서인가, 속에 메슥거리고 현기증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오직 걸어야 한다는 룰은 변함없이 유지된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커피숍으로 들어가 커피를 한 잔 주문하고 휴식을 취한다. 여전히 입안이 깔끄러워 커피가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홀짝인다. 커피향과 맛으로 증강현실은 잦아들지만 11월에 장맛비 같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현실의 나주도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여기도 오래 휴식할 만한 공간이 아니라는 위기감이 고조돼 시계를 보지만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오전. 저녁 일곱 시를 지정한 너의 의도가 종류를 알 수 없는 외계인 텔레파시처럼 난감하게 되새겨진다.
삼십 분 정도 커피숍에 앉아 있다가 나와 다시 걷기 시작한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날빛은 점점 무겁게 가라앉는다. 정오도 되지 않았는데 저녁 여섯 시 무렵 같다. 휴대폰 길찾기 안내를 열어 목적지를 누르고 쫓기듯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마음이 다급해질 이유가 없는데 걸음이 절로 빨라진다.
빗줄기에 바람까지 가세해 우산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 상황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다. 지정되거나 예정된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것 말고 다른 방도가 없다. 그래서 이것이 처음부터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게임이거나 프로그램인지 소리쳐 묻고 싶다. 그래서 어느 지점에선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휴대폰을 노려본다. 휘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너에게 전화를 걸어 악을 쓰고 싶다.
너의 하룻밤에, 도대체, 내가, 왜!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제12회 이병주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인형의 마을』 『호텔 캘리포니아』 『내 마음의 옥탑방』 『가시면류관 초상』 『운명게임』『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소설가』 『검색어 : 삶의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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