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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 아일랜드

소설 단편

구효서 2024-02-04

ISBN 979-11-93452-25-7(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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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는 바람이 붑니다. 질풍, 미친바람입니다. 그래서인지 섬도 흔들리는 듯합니다. 이름마저도 올도扤島네요. 모든 게 위태롭고 불안하고 불온하니 그 섬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도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올도를 찾은 작가 ‘오’도 흔들리기는 마찬가지고 건너편 창가의 ‘여자’도 예외일 수 없겠지요. ‘오’가 지켜본 바로는 그녀가 아무래도 남편과 남편 아닌 다른 남자 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그녀는 섬에 가장 큰 바람이 불어닥치던 위험한 밤, 바닷가에 나가 난폭한 흔들림에 온몸을 맡겨 춤을 춥니다. 춤이라니요. 그녀가 보내준 그녀의 춤 공연 초대장이 아직도 책상 위에 있으니, 어서 가서 춤의 비밀을 알아봐야겠습니다.

오가 피콕 그린에 들어섰을 때 이미 거실에는 잘게 잘린 천 조각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새로 도착할 원단 활용을 궁리하며 와인을 마신 모양이었다. 여자는 마름질한 천과 천을 바느질이 아닌 접착제로 붙여 나갔다. 오는 공작의 느낌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알았다. 공작의 긴 꼬리에서 떨어져 흩어졌던 문양들이 그녀의 손을 거치면서 새로운 의상으로 거듭나고, 그것을 몸에 걸칠 여자는 작품 속의 공작이 되는 거였다.

“모던댄스요. 무대의상이거든요. 제가 직접 디자인해요.”

오는 뭔가 알아맞힌 것 같았다. 휘청, 섬이 기울며 흔들렸다. 여자는 춤추는 공작이었던 것이다. 자로 잰 듯한 ㄴ이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의 흐느적거림도 와인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거기엔 결을 이루며 짜여 가는 몸동작의 미묘한 흐름이 있었다. 그걸 알아차려서 흔들린 걸까 흔들려서 알아차린 걸까. 모로 걷는 아일랜드 좀느릅나무 할머니는 어디를 지나고 있을까.

오는 김하분 막걸리의 작은 잡석 주차장에 서 있는 차콜색 승용차를 내려다보았다. 노을빛에 물드는 승용차는 며칠 전 보았던 검은색 승용차가 아니었다. 멀리서도 검정과 차콜의 구분은 확연했다. 조금 전 승용차에서 내려 피콕 그린으로 올라간 사내도 검은색 차의 남자가 아니었다.

검은색 차량의 남자가 도착했던 날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이곳 사람들이 말하는 흥글보름. 해가 지고 꽤나 어둑해질 무렵이었는데도 차에서 내린 남자의 사납게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김하분 막걸리의 희미한 불빛은 피콕 그린으로 오르는 길의 중간까지밖에 비추지 못했다. 남자는 가을 트렌치코트 자락을 여미며 나머지 반의 어둠 속으로 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그날, 밤이 깊어도 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피콕 그린의 창에서는 어떤 빛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이따금 덧문이 바람을 못 이겨 열리는 것 같았다. 경첩이 내는 마찰음과 덧문이 건물 외벽을 둔탁하게 때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오는 잠에서 깼다. 바람에 좌우로 흔들리는 피콕 그린의 나무 덧문은 누군가를 다급하게 부르는 손짓 같았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거나, 있다면 다 죽어버린 게 아닐까 싶게 피콕 그린은 거친 바람 속에서 괴괴했다.

1957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별명의 달인』 『아닌 계절』 등과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내 목련 한 그루』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타락』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등이 있으며,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 『인생은 깊어간다』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avocado1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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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1 불안한 올도의 유혹 솔트 2024-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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