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이 필요한 게 아니라 사랑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세상.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라. 수많은 사람이 흔한 청바지를 입고 있다. 짱짱하면서 보드라운 인디고 블루 청바지. 사랑은 물 빠진 청바지처럼 허무맹랑하고 그런 사랑을 걸친 우리 존재도 흔하디 흔하다.
너와 나는 청바지고, 그런 청바지들이 잠 못 드는 새벽에 올려다본 하늘은 시퍼렇게 까만 청바지 빛이다. 사랑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사랑이 마땅히 아니라는 걸 사랑은 알까?
눈雪의 결정체를 심장에 숨겨둔 그대들에게, 인디고블루 청바지로부터.
그의 오피스텔 차임벨을 눌렀다. 응답을 기다린 건 아니었다. 벨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곧장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익숙한 섬유유연제와 그의 살비듬 냄새 속에 배달 음식 냄새가 뒤섞인 뒤숭숭한 냄새가 어둠 속에서 나를 맞았다. 오래전부터 고장 나 있던 현관 센서등이 작동하지 않아서 깜깜했다.
벽을 돌아가야 하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인기척이 없었으나 머릿속에서 연놈이 뒤엉킨 영상이 나를 지배했다. 허연 다리 네 개를 발견하면 콜라를 퍼부으려고 가방 속에 넣어두었다. 침대엔 그놈이 벗어놓은 허물만 구슬프게 놓여 있고, 몸은 미끈하게 빠져나가고 없었다. 매끈한 몸과 마음은 어린 여자에게 가 있었다.
커다란 텔레비전 앞에 놓인 조그맣고 말라비틀어진 탁자에 일회용 그릇들이 보였다. 혼자 먹은 것인지 둘이 먹은 것인지 모호한 탕수육과 짜장 하나씩이었다. 기름기가 말라붙어 있는 것만으로는 오늘 먹은 것인지 사흘 전에 먹은 것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나는 컹컹 짖는 개처럼 그릇에 얼굴을 박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사흘쯤 방치된 짜장 그릇은 의부증에 빠진 여자의 머리카락 냄새를 풍겼다.
한동안 커다란 슬리퍼를 끌며 방을 오락가락했다. 이제부터 명쾌한 발걸음이 가야 할 곳은 하나였다. 곧장 햇배우의 집으로 쳐들어가야 했지만 나는 주저했다. 거기서 무얼 보고 겪든 나는 복도에 내놓은 짜장 그릇이 되리라. 사랑을 닮은 클리셰였다.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고층 빌딩 너머로 시베리아 공기가 섞인 대기를 바라보며 마음을 식혔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퍼런 새벽의 하늘이야말로 청바지 빛이었다. 시퍼렇게 까만, 공기 중에 청산가리 몇 방울 탄 농도. 산다는 건 살거나 혹은 죽는 것이었다. 다른 것은 없었다.
며칠 후 그놈이 내 집 앞에 와서 사실을 말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했다. 그놈은 잘못을 인정하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원래 그런 놈인 걸 내가 알고 있었다는 게 한심했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너란 인간은 한번 쓰고 버리는 쓰레기이며, 영화판에서도 일회용이 될 거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놈이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랬다.
넌, 청바지 같아. 열에 아홉은 입고 다니는 좆나 지겨운 인디고 블루 청바지.
그 후로 지하철에서 길거리에서 성도착자처럼 사람들의 아랫도리를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이 인디고블루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총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