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행금지가 해제된 것은 1982년 1월 5일. 어느덧 42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통행금지가 해제되기 전에 돌아가신 분도 있겠지만 아예 통행금지라는 게 없는 시절에 태어나 자란 분도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 태어나 통행금지가 없는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20대 중반의 어느 날 갑자기 통행금지가 없어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통행금지가 없으면 큰일 날 것 같았던 세상이 멀쩡하기만 했던 게 더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에도 충청북도만큼은 해당지역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충청남도는 물론 통행금지가 시행되고 있었지요.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충청북도와 충청남도 경계에 놓인 작은 다리 조천교를 무대로 그 얘길 해 보고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놓여 있던 조천교와, 존재와 부재 사이에 놓여 있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요.
김선녀의 양산은 선배의 집에서 5킬로미터나 떨어진 미호강 모래톱에서 발견되었다. 사고 후 열흘만이었다.
2년 전 벚꽃 만발해 화사했던 봄날, 그녀는 선배가 생일 선물로 사 준 레이스 자수 양산을 처음 꺼내 쓰고 조치원읍 으뜸길을 신나게 걷고 있었다. 신나게 걷고 있었을 거라고 선배는 아내의 영정 앞에서 말했다. 바라고 바라던 쿠레타케 캘리그라피 붓펜을 사러 가던 중이었다니까. 그러다 그만 인도를 침범한 급발진 차량에 치여 선배의 아내 김선녀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내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그가 세 번 우는 것을 보았다. 안 울었다고 그가 우겼지만 나는 그의 커다란 눈에 고이는 소주 반 잔 정도의 눈물을 보았다.
글씨를 가르쳐주겠노라 하루라도 더 일찍 말을 했더라면 아내가 미리 붓펜을 사러 갔을 거고, 그러면 그날의 사고도 면할 수 있지 않았겠냐며 그가 울었다. 아내는 그에게서 오래전부터 글씨를 배우고 싶어 했다.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겨온 자신이(실은 자신의 글씨가 배우고 말고 할 게 못 된다고 말해온 선배였지만) 원망스럽고 후회된다고 했다.
선배는 급발진 차량이 아내를 치고서 뒤이어 쓰러뜨린 벚나무 가로수 얘기를 하면서도 울었다. 웃음이 고통스럽게 섞였다. 검은 줄기 흰 꽃 반발한 벚나무가 바닥에 쓰러진 아내의 몸을 타고 눌렀는데 아내가 죽으면서 그 나무를 서방보다 더 애틋하게 끌어안고 있었다며 선배는 흐드득 숨을 삼켰다.
폐역이 된 내판역 얘기를 할 때도 선배는 눈시울을 붉혔다. 목적지인 조치원역에 닿기 전 마지막 역이 내판역이었는데 저녁의 통학 열차가 내판역에 당도할 때마다 “다 왔다. 이제 다 왔다.”며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떠올렸다고 했다.
장례가 끝난 뒤에도 내판역 얘기는 한 번 더 했다. 내판역은 장욱진 생가 옆에 있는데 그곳의 작은 문주천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곧 미호강이 나왔다. 선배가 어렸을 적 종개를 잡던 곳이었다. 등에 모래 문양이 있어 모래에 숨으면 찾기 힘든 어여쁘디 어여쁜 물고기였다고.
그 종개가 살던 모래톱에 아내의 자수 양산이 처박혀 있었다고 했다. 아내가 숨진 곳으로부터 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었다. 얼마나 심하게 치였으면, 아내의 몸이 얼마나 높이 공중에 솟구쳤으면 그때 놓친 양산이 내판역까지 불려갔을까.
1957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별명의 달인』 『아닌 계절』 등과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내 목련 한 그루』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타락』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등이 있으며,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 『인생은 깊어간다』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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