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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모래의 시간

소설 단편

이순원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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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잡고 산다’는 말은 균형 잡고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우리 모두 균형감각을 알고 있고, 그것을 의식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인생은 99.9%가 균형을 허물게 하는 장애와 다를 게 없다. 다른 남자의 차를 타고 가다가 죽은 아내를 기억으로 견디며 균형을 잡는 일에는 전생과 현생의 모든 인과가 동원되어도 부족할 만큼의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설정을 통해 내가 말하고 싶었던 본질도 역시 인생의 슬픔이다. 죽음을 능가하는 슬픔이 어디 있겠는가.

속도를 줄이고 영동에서 금산 쪽으로 나갔다가 다시 조금은 난감하고도 황당한 기분으로 금산에서 영동 쪽으로 되짚어 오던 길에 가슴 앞에 걸고 있는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그가 얼른 플립을 열고 기척을 하자 저쪽에서 굵고도 사무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한여름에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으로 아내의 이름을 대며 보호자를 찾았다.

“예. 제가 신미은의 보호자입니다.”

상대는 거듭 보호자라면 신미은씨와 어떤 관계냐고 물었다. 그는 길가에 자동차를 세우고 남편이라고 대답했다.

“이런 참…… 그러면 놀라지 말고 들으십시오. 여기는 병원이고, 저는 경찰입니다. 오늘 낮에 자유로에서 자동차 사고가 있었습니다.”

“……”

“그 사고로 신미은씨가 사망했습니다.”

순간 놀라기도 했겠지만, 그의 정신은 오히려 이것이 바로 명료함이지 싶을 만큼 맑아지며 차분해졌다.

“아내가 사고를 낸 겁니까?”

그럴 리 없겠다 싶으면서도 확인차 그가 물었다.

“아닙니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따로 있는데 그 사람도 사망했습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그는 다시 또박또박 말을 끊어 물었다.

“일산 ㅂ병원입니다. 병원 응급실에 오시면 거기에서 안내해줄 겁니다.”

“일산이요?”

“예.”

일련의 명료함 속에 그 말이 왜 낯설게 들렸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곳이 어딘지 모르지 않지만 그의 집은 서울에서도 그 반대쪽인 길동이었다. 있지도 않은 자동차를 끌고 나간 것도 아닐 테고, 운전도 잘 할 줄 모르고 게다가 길까지 어두운 아내가 왜 그곳까지 가서 그런 사고를 당했다는 것인지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휴가 절정기라 상하행선 모두 꽉꽉 막혀있는 길을 뚫고 올라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이미 응급실에서 영안실로 옮겨져 있었다. 그가 확인한 것은 아내의 얼굴이 아니라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도 모르게 흉측하게 부서져 있는 한 여성 교통사고 사망자의 얼굴이었다. 사고가 난 곳이 일산과 파주 중간쯤 지점으로 서울에서 파주로 나가는 길이 아니라 파주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이었다는 것도 그는 병원에 와서야 들었다.

그는 어디에서 사고가 났든 아내가 타고 있는 자동차를 길 반대편에서 다른 자동차가 정면으로 달려와 부딪쳐 양쪽 자동차에 탄 사람 모두 사망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모르는 어떤 남자의 자동차에 아내가 동승했으며, 급커브 길에서 가드레일을 받고 튕겨져 나가며 두 사람 다 그 자리에서 절명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먼 곳에서 연락받고 늦게 도착했지만, 병원에 일찍 나온 남자 쪽 유족들은 사고수습도 이미 낮에 다 끝내고 남자의 시신을 저녁 무렵 서울 어느 대학병원의 장례식장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1988년 「문학사상」에 「낮달」을 발표하며 데뷔. 창작집으로 『첫눈』 『그 여름의 꽃게』 등이 있고, 장편소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수색, 그 물빛 무늬』 『아들과 함께 걷는 길』 『나무』 『워낭』 『벌레들』(공저) 등 여러 작품이 있다. 동리문학상, 남촌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수상


lsw83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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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긴 여운이 남는 소설 솔트 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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