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운명이나 정해진 규칙 같은 것은 없다고 믿었다. 부유하는 입자처럼, 복잡계의 규칙에 따라 예측 불가능한 운동과 우연한 충돌로 이루어진, 정형할 수 없는 점액질 형태의 어떤 것을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타인의 눈에 어른이라고, 혹은 이제 늙었다는 말을 들을 즈음, 내 삶에도 어느 정도 윤곽과 형태가 잡혀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충동대로, 자유롭게 흘러왔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불확정성과 불가해성의 총합은 구체적인 모양을 잡고 초점을 잡아서 삶의 흐름을 만들었다. 그 흐름의 끝에는 글을 쓰기로 한 내가 서 있었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닥치는 대로 읽고, 손에 잡히는 모든 활자를 포식했지만, 그럼에도 늘 지식과 활자에 굶주렸다. 많은 것을 읽고, 많은 것을 알게 된다면 부조리한 삶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읽는 것만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삶은 누가 써주는 글이 아니라 내가 써가는 이야기. 답은 누가 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내가 만들어 가는 것.
긴 세월을 우회하며 마침내 깨달았다. 삶의 규칙은 내가 써가는 글에 있다는 것을. 운명은 하루하루 빈 여백을 메우는 내 키보드 소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도.
우리 모두 무한한 우주 속에 부유하는 입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창조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사유하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유이다.
읽을 대상이 없을 때, 나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특히 초등학교와 중학교 무렵에는 증상이 심각했는데 읽을 것이 없으면 국어사전, 인명사전, 혹은 영어사전이라도 읽었다. 그마저도 없다면? 하다못해 전화번호부라도 뒤져서 읽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주변에 책은 많았다. 아버지가 남긴 유품 대부분이 책이었고 어머니는 다른 건 아꼈지만 책에 돈을 쓰는 데에는 후했다. 그러나 탐닉을 만족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는 서점이었다. 서점이라면 몇 시간이라도 혼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잠시 혼자서 멍하니 있어야 하는 시간, 예를 들어 버스를 기다리거나 친구와 약속을 잡고 기다릴 때, 책이 없다? 그때가 가장 곤혹스럽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신문쪼가리나 광고지, 전단을 주워 읽었다. 혹 그러다가 재미있거나 흥미로운 잡지 조각이나 기사를 발견하고 몰입하다가 차를 놓쳐서 정작 약속 시간을 못 지키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병이 맞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자신을 활자 중독자라고 정의했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그 반응은 예상외였는데 어떤 사람은 허세를 부린다고 여겼고, 어떤 사람은 부럽다고 말했다. 많이 읽고 많이 아니까 그게 부럽다는 뜻이었다. 그때에는 지식에 대한 열망과 낭만이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많이 아는 것은 좋은 것이고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었다. 지금과는 사뭇 공기가 달랐다.
그러나 항상 궁금했다. 왜 나는 이런 병에 걸린 것일까? 왜 증세는 낫지 않고 점점 심해지는 것일까? 증세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냐 하면, 대학원 다닐 무렵에는 운전하다가 신호에 걸렸을 때도 책을 읽어야 했다. 신호를 기다리다 책에 빠져 뒤차의 경적에 출발할 때도 많았다. 내 차의 승객이 된 사람은 그제야 내가 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불안하다고 책을 놓으라고 말해도 말을 듣지 않는 내게 이 정도면 병이라고 말했다. 그럼 나는 대답한다. 진작 자백하지 않았느냐고. 내가 활자중독증 환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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