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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광

소설 단편

임재훈 2024-05-19

ISBN 979-11-93452-42-4(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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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아이들을 지켜 주는 존재로서 점점 힘을 잃어 가는지도 몰라, 하는 생각을 십 년 전쯤부터 해 오고 있다. 나 자신을 비롯한 이 시대 어른들을 원망하는 일이란 누구나 할 수 있는 넋두리 같고, 또 궁극적으로는 정책 입안자들을 닦달해야만 실효성을 띠는 과업인 듯해서, 소설의 세계에서는 거꾸로 ‘어른을 보호하는 아이’, ‘어른이 의지하는 아이’, ‘어른보다 더 강인한 아이’, ‘어른의 세계를 위호하는 아이’를 그려 보고 싶었다. 나도 언젠가 소설 속 ‘왕곤’ 같은 딸아이의 품에 안겨 볼 수 있을까. 그런 어른답지 못한 생각을 하면서 이야기를 끝맺었던 것 같다.

왕곤. 친구들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우량아였던 곤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는 내내 또래들보다 체격이 컸고 동갑내기 소년들보다 팔심이 월등히 셌다. 여자애들 괴롭히기 좋아했던 남자애들은 곤을 뚱곤, 곤돼지라 놀렸다. 놀림감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이거나 뒤통수를 ‘빡’ 소리가 날 만큼 가격당하고 나서야 녀석들은 친구의 이름을 옳게 불렀다.

곤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 여자아이들을 위해서도 남아들을 때렸다. 주먹질과 발길질 틈틈이 그녀는 “엑스펄소!”라 외치고는 했다. 제압한 뒤에는 반드시 보상을 주었는데, 호주머니에서 희귀 판박이 스티커가 동봉된 풍선껌을 꺼내 맞은 애 손에 쥐어준다거나, 쓰러진 애를 일으켜 세워 동네 슈퍼에 데려가 군것질거리를 사 주는 식이었다. 학용품 사라고 부모님에게 받은 용돈을 곤은 그런 일로 탕진하고는 했다. 이런 사례가 시나브로 쌓여 아이들 사이에 영웅담처럼 퍼지면서 자연스레 곤은 왕곤이라는 별호를 갖게 되었다.

곤은 제 전과(戰果)를 매번 일기장에 기록했는데, 해피엔드의 마지막 마침표 뒤에는 필기체 영어로 ‘Reparo!’라 적었다. 그녀의 일기 내용은 마치 엑스펄소의 화신 송적, 레파로의 치유사 송곤이 공동 주연하는 학원물이자 활극 같았다.

도움을 받은 여자애들뿐 아니라 왕곤의 무력 진압을 당한 남자애들도 곤을 대장으로 여겼다. 그녀의 특수한 용인술 때문이었는데, 곤은 한 번 팬 녀석을 또 손봐 주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또 다른 피보호자로 대했다. 이를테면 고등학생 때, 일진 무리에게 둘러싸여 집단 구타를 당하던 남학생을 발견한 그 즉시 곤은 현장에 뛰어들었다. 피해 학생은 초등학교 동창생이었다. 여자 급우들에게 아이스케키 장난을 치다 곤의 손아귀에 급소를 틀어잡혀 제 잘못을 인정한 뒤 보상물로 ‘오리온 밀크 카라멜’ 한 상자를 받았던 녀석이었다.

가해 학생들은 남자 셋에 여자 셋이었다. 곤은 그들의 등 뒤에서 급습했다. 선제공격 대상은, 여섯 중 리더로 보이는 최장신 남자애의 등 뒤에 처녀 귀신인 양 백허그 자세로 달라붙어 있던 깻잎머리 여자애였다. 곤은 전력 질주해 그러모은 가속력을 남김없이 상대의 오른쪽 옆통수를 향해 터뜨렸다.

힘은 즉발했고 상대방은 가격부의 반대 방향으로 기울며 시멘트 바닥에 왼머리를 찧었다. 불시의 급습에 나머지 다섯 명이 혼탕해진 일촌광음이 무용해지기 전 곤은 잽싸게 그 순간을 비집고 들어가, 처녀 귀신을 떼어낸 키 큰 남자애의 경추골을 두 밑주먹으로 동시에 찍었다.

장신의 거구는 서 있던 자세 그대로 무너졌다. 즉 그는 곤을 등진 채로 무릎을 꿇고 내려앉은 것이었다. 공격자에게 최적의 스탠스를 허용하고 만 셈이었고, 곤은 대전자의 실책을 한 번쯤 물려주는 대자대비 따위는 보여주지 않았다. 어느새 깍지로 융합된 곤의 두 손은 주저앉은 목표물의 머리통 높이와 정확히 평행선상에서, 이백사십 도 궤적의 가속도로 남자애의 목 옆점을 졸창간에 들이받았다. 깻잎머리 처녀 귀신 귀에서 흘러나온 피는 이내 그 옆에 같이 누운 거구의 교복 깃으로 스며들었다.

2023-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2024 종이책『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공저) 출간

웹북 『공동​』​『주변인으로서의 작가』 『지진광』​ 출간 

 

jayjhl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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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아들어갈 때 미카 20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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