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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문장1: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소설 장편 분재

박상우 2024-07-21

ISBN 979-11-93452-50-9(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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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해발 1,330m의 백두대간 만항재에서 나는 쿄쿄를 처음 접했다. 내 왼쪽 어깨 쪽으로 접속해 쿄쿄, 쿄쿄, 하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2007년 가을부터 본격적인 영감의 다운로드가 시작되었지만 나의 부족한 받아쓰기 실력 때문에 숱한 문장들이 날아가고 엄청나게 많은 원고 매수들이 삭제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2016년 거의 10년 가까운 기간에 걸쳐 나의 받아쓰기는 완성되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라는 망상에 빠져 망설임 없이 책을 출간했다. 하지만 책을 출간하고 한 달쯤 지난 뒤 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는 걸 자각하고 죽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출판권 계약기간 5년이 만료될 때까지 어느 하루도 마음 편히 보내지 못했다. 내가 쓴 것처럼 위장한 그 소설로 인해 나는 용서받기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5년이 지난 2021년 6월 나는 출판사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안타까움 심정을 토로하고 출판권을 돌려달라고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대표를 위시한 관계자들이 작가의 심정을 넉넉히 이해해 출판권 일체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3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이 작품을 수도 없이 수정하고 출간 시기가 주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출간이 나의 무지한 작가적 욕망 때문에 참담하게 실패했다는 걸 시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책의 운명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24년 7월, 『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이 드디어 스토리코스모스에 공개된다. 2005년부터 시작된 기이한 가이드와 훈련을 거쳐 드디어 이 작품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 소설 때문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스토리코스모스 플랫폼에 이 작품이 자리잡게 되는 기이한 신비도 경험하게 되었다.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지구상에 없던 단어 ‘스토리코스모스’가 세상에 나타나게 된 과정과 그것의 의미에 얽힌 우주적 배경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언어가 아니고 의미 또한 아니다.

요컨대 이 소설은 내가 쓴 게 아니다. 아니 내가 썼다고 말할 수 없는 소설이다.

토요일 밤에 나눈 따뜻한 섹스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나는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퇴출당했다. 일요일 오전, 거리의 풍경은 한없이 평화롭고 사람들의 표정은 자애로웠다. 오직 나 하나만 천국에서 퇴출당해 지옥불 속을 걷는 것 같았다.

제로가 누구냐?

일요일 오전에 그녀에게서 받은 푸대접과 짝을 이루어 ‘제로’는 나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적어도 제로의 정체에 대해 그녀가 알려주기 전까지 나는 정신적 외상에 시달려야 했다. 제로가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그녀와 나 사이에 끼어들어 이렇게 고통을 초래하는가. 제로와 그녀의 관계보다 나의 입장을 먼저 정리해 나는 그녀에게 따지고 싶었다. 제로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이며 나는 또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오해하지 마. 제로는 사람이 아니야.”

문제의 일요일로부터 3일이 지난 뒤 나는 퇴근 후에 써니를 만났다. 그녀는 일요일 오전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으로 밝게 웃으며 제로를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려 했다. 파스타를 먹고 몇 잔의 와인을 마시는 동안 그녀는 시종 내 손등을 쓰다듬으며 기분을 풀라고 말했다. 세 살 연상의 연인이 아니라 이모나 고모 같은 분위기가 느껴져 당혹스러웠다. 위장막 뒤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실체를 목격했다고 좋아했더니 이제는 정신적 실체에서도 위장막이 느껴져 눈앞에서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제로는 그냥 제로야. 영(0), 알지? 수학에서 제로는 아무것도 없거나 무한을 의미하는 공포야. 제로로 뭔가를 나누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녀의 물음을 접하는 순간 뭔가 선뜩한 것이 등줄기를 스쳐갔다. 제로로 곱하면 모든 것이 제로가 되는데 제로로 나누면?

“제로로는 나누기를 하면 안 돼. 그건 수학적으로 정의가 되지 않는 연산이야. 제로로 나누기를 하면 수학의 기반이 붕괴돼. 수학뿐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에서도 제로를 사용하면 안 돼.”

컴퓨터 프로그램에 제로를 제거하지 않고 남겨두었다가 순항을 멈추어버린 미국의 전함 요크타운호 프로그램 버그를 그녀는 사례로 덧붙였다. 10억 달러짜리 8만 마력의 전함을 제어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설치한 기술자들이 제로를 제거하지 않고 남겨두는 실수를 저질러 꼬박 이틀 동안이나 꼼짝 못 했다는 것.

그날 밤 그녀가 들려준 제로의 위력은 무궁무진했다. 숫자를 사용하던 고대에는 아예 제로의 개념이 없었고 제로의 개념이 형성된 뒤에도 그것에 대한 공포 때문에 고대인들은 극심한 두려움에 시달렸다고 한다.

무(無)인 동시에 무한인 제로, 아무것도 없는 혼돈인 동시에 공허인 제로. 히브리어로 혼돈과 공허를 ‘토후 브 보후(tohu v’bohu)’라고 한다고 그녀는 알려줬다. 나는 신기한 주문을 따라하듯 토후 브 보후, 하고 발음해 보았다.

“토후 브 보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제12회 이병주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인형의 마을』 『호텔 캘리포니아』 『내 마음의 옥탑방』 『가시면류관 초상』 『운명게임』『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소설가』 『검색어 : 삶의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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