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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문장6: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소설 장편 분재

박상우 2024-08-25

ISBN 979-11-93452-55-4(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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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스토리 저장고 아카샤(ākāśa)를 설명할 때 쿄쿄는 보르헤스의 소설 「바벨의 도서관」에서 ‘육각형’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추출해 하나로 연결해 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실제로 그렇게 하자 18개의 문장으로 구성된 8개의 단락이 나타났다. 소설 본문 중에 전문이 있으니 그중 두 개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우주(다른 사람들은 ‘도서관’이라 부르는)는 부정수 혹은 무한수로 된 육각형 진열실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어떤 육각형 진열실에서도 끝없이 뻗어 있는 모든 위층과 아래층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각 육각형마다 서로 교차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두 개의 등이 있다.

― 육각형 진열실에 가면 그 어떤 개인적 문제나 세계 보편적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을 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벌써 4세기 동안 육각형들을 샅샅이 뒤져왔다…… 어떤 육각형의 어떤 책장에 틀림없이 진귀한 책들이 감추어져 있겠지만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나의 지력과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장면들이다.

그런데, 왜 육각형일까?

밤 11시가 갓 지난 시각이었다. 차원을 넘나드는 존재가 못 갈 곳이 어디인가, 하는 나의 요구에 대해 그녀는 가타부타 응대하지 않고 은은한 미소만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그것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한시바삐 확인하고 싶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한번 채근했다.

“어디로 가고 싶은 건가요?”

이윽고 그녀가 물었다.

“광화문은 어떨까?”

정말 광화문으로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반응이 궁금했다. 어떤 제한과 한계가 그녀에게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걸 나는 알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기대를 보기 좋게 뭉개버리며 그녀는 나의 요구에 선선히 응했다.

“좋아요. 그곳으로 가서 멋진 꿈을 만들어보죠.”

그녀는 자신도 잠시 준비를 해야 하니 나보고 잠깐만 돌아서 있으라고 했다.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와 광화문 밤나들이를 하는데 그 정도 요구쯤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옷을 갈아입으려는 건가? 황당한 상상력을 부풀리며 몇 초 정도 나는 그녀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이제 됐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뒤로 돌아섰다. 돌아섰는데, 어찌 된 셈인지 방금 전까지 초인의 집이었던 공간은 온데간데없고 거대하고 낯선 공간이 나타났다.

어둑어둑한 녹색 공간이 너무 낯설어 나는 당황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은 빌딩과 광장, 그리고 동상을 보며 나는 비로소 그곳이 광화문 광장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농밀한 대기와 정적 속으로 은파(銀波) 같은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만월이 중천에 걸려 지상을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셈이지 차량과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텅 빈 거야?”

주변을 살핀 뒤 나는 등을 보이고 선 쿄쿄에게 물었다.

“차량과 사람을 내가 배제했어요. 첫 데이트인데 분위기를 잡으려면 그 정도 배려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나에게 등을 보이고 선 그녀의 음성이 이상하게 들렸다. 전체적인 모습도 쿄쿄보다 크고 차림새도 달랐다.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앞에 선 여자가 천천히 등을 돌려 나를 향했다. 그녀의 정수리로 떨어진 달빛이 긴 머릿결을 타고 흘러 금빛 아우라가 형성된 것 같았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조건반사처럼 절로 눈두덩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 써니!”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끼며 탄성을 터뜨렸다.

“안심해요. 나는 당연히 써니가 아니죠. 이것도 당신의 데이트를 위한 작은 배려일 뿐이에요.”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제12회 이병주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인형의 마을』 『호텔 캘리포니아』 『내 마음의 옥탑방』 『가시면류관 초상』 『운명게임』『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소설가』 『검색어 : 삶의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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