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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문장7: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소설 장편 분재

박상우 2024-09-01

ISBN 979-11-93452-56-1(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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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보기-바로 쓰기
다시 쓰기-다시 보기

이것이 소설에 등장하는 ‘스토리 명상’ 방식이다. 그 시스템을 쿄쿄는 끝이 없는 무한반복의 시작이라고 했다. ‘다시 쓰기’와 ‘다시 보기’ 단계는 시간이 지나면 도리 없이 ‘바로 보기’와 ‘바로 쓰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시각각 인간의 의식이 초점을 잃고 본체의식과 분리되기 때문에 도리가 없다는 것. 사람들은 자기의식이 또렷하고 명징하다고 착각하지만 그 주관적 판단 자체가 꿈속의 망상이라는 지적이었다. 오직 순환 구조만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게 만들고 그것만이 모든 것을 새롭게 유지할 수 있다는 메시지.

메시지를 접할 때는 몰랐는데, 세월이 지난 뒤에 저 스토리 명상 구조가 소설창작의 방식에 가장 적절한 구조라는 걸 깨쳤다.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인생의 구조도 소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스토리 운용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또한 깨쳤다.

소설 같은 인생, 인생 같은 소설.

몽환적인 취중에도 끝내 스러지지 않는 선명한 의식의 가닥이 있었다.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와중에도, 그리고 그것이 끝난 뒤에도 나의 내면에서는 정신적 동화작용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와 내가 본질적으로 동화될 수 없는 상대인 것 같다는 직관적 거리감 혹은 거부감 같은 것.

“나, 한 가지 고백하고 싶은 게 있는데……”

섹스가 끝난 뒤, 그녀가 습하게 가라앉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말하고 싶으면 해.”

“나, 육 개월 전까지 사귀던 상대가 있었어.”

“……”

“여자였어.”

“여자?”

나는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여자.”

나는 상체를 반쯤 일으키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뇌에서 강렬한 혼선이 일어나 지금 나에게 전개되고 있는 스토리의 전후 맥락이 잡히지 않았다.

“무슨 얘기지? 그러니까……”

“맞아, 양성애자야. 단순한 양성애가 아니고…… 한 번씩 성적 상대를 바꾸는 스위치형. 그러니까 여자를 사귀면 남자를 갈망하게 되고, 남자를 사귀면 여자를 갈망하게 되는…… 한마디로 말해 저주받은 성 정체성이야.”

“대단하네. 남들이 상상하지 못할 능력이잖아.”

“능력이 아니라 결핍이야. 성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정신, 정신이 메워지지 않아서 쉼 없이 방황하는 거야.”

“그럼 지금도?”

“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생 전체가 방황이라고 생각해. 안 그런 인간 있나?”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제12회 이병주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인형의 마을』 『호텔 캘리포니아』 『내 마음의 옥탑방』 『가시면류관 초상』 『운명게임』『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소설가』 『검색어 : 삶의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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