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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문장12: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소설 장편 분재

박상우 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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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도입부에 나타났다 사라진 써니가 소설의 후반부에 다시 나타난 걸 나는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회귀가 나의 작가적 판단으로는 상투성과 연결되어 적용하기 어려울 것인데 그녀가 나타나는 걸 보고 매우 의아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놀라운 평행우주적 결말을 예비하고 있었음을 알아차리곤 조용히 침묵하며 마음을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내가 이십 대 초반에 듣던 보니 엠의 노래 ‘Sunny’가 떠올라 유뷰브를 열고 그 노래를 여러 번 되풀이 들었다. 감사하다는 말 이외,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

Sunny, thank you for the truth you let me see.
Sunny, thank you for the facts from A to Z.

교보문고에서 나와 그녀와 나는 인사동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와 함께 걷는 느낌이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예전에 그녀와 함께 걷던 감각이 신기할 정도로 빠르게 되살아났다. 그녀와 나의 보행을 거스르듯 주변으로 엄청 많은 사람이 오가는데도 소음이 가라앉고 오직 그녀와 나의 존재감만 두드러졌다.

“언젠가 꿈에 필우 씨와 광화문을 걷는 꿈을 꾼 적이 있어. 달이 뜬 밤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광화문에 사람도 없고 차도 없고 오직 우리 둘만 있는 꿈이라서 너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 정말 믿어지지 않는군. 나도 똑같은 꿈을 꿨는데……”

그 순간, 나는 쿄쿄와의 광화문 데이트를 떠올렸다. 그날 밤 쿄쿄가 연출한 광화문 장면이 써니에게도 접속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써니와 헤어져 있는 동안 그녀와 나의 의식 에너지는 실질적으로 단 한 번도 분리된 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겹치고 접히는 인연의 시공을 관통해 가까스로 써니를 만난 지금, 나는 다시 한번 벅찬 감동을 느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녀가 알아듣거나 말거나 내가 하고 싶은 말,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가감 없이 그녀에게 전달했다.

“지금 바로 이곳이 내가 접속한, 내가 존재하는 나의 차원이야. 우리가 모르는 무한 우주가 펼쳐져 있다고 해도 나와 써니의 인생 스토리가 전개되는 지금 이 채널이 나에겐 가장 소중해. 이것이 설령 꿈이고, 홀로그램이고, 내가 영적 존재의 퍼스낼리티로 구현된 아바타라 할지라도 나는 이곳에서 써니와의 인생 스토리를 전개하고 싶어. 이 우주의 실체와 전모를 알게 된다고 해도 나는 그런 인간적 욕망을 포기할 수 없어. 그게 지금 써니를 만나고 있는 내 에너지로부터 증류된 맑고 순수한 메시지야. 이 느낌, 전해져?”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물었다. 나의 유치찬란한 수사(修辭)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금도 놀라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그녀의 표정만으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필우 씨가 설명하지 않아도 다 느껴져. 그런 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에너지로 전해지는 거잖아. 우리는 특히, 이 지구상의 누구보다도 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인사동에는 외국인 관광객이 엄청 많이 붐볐다. 하지만 써니와 나는 손을 잡은 채 투명한 기류처럼 인파에 시달리지 않고 마치 그들을 관류하는 것처럼 가볍고 유연한 보행을 계속했다. 그렇게 인사동을 거슬러 북촌길로 접어들자 비로소 호젓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때를 놓칠세라 나는 망설이던 질문을 그녀에게 건넸다.

“혹시 사귀는 남자 있어?…… 설마 그동안 결혼을 한 건 아니겠지?”

극도로 긴장한 나의 표정을 보고 어이가 없는지 쿡, 하고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나서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소설가를 한 번 사귀어볼 작정으로 아무도 안 만나고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그 소원이 오늘 이루어졌어. 마침내, 가까스로……”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제12회 이병주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인형의 마을』 『호텔 캘리포니아』 『내 마음의 옥탑방』 『가시면류관 초상』 『운명게임』『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소설가』 『검색어 : 삶의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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