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잘 써야겠다는 욕심은 내지 않았다. 다만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주인공인 김선호의 죽음을 애도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소설을 읽은 누군가의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하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또 누군가는 2023년 8월 3일, 오후 5시 56분경 일어났던 그 날의 일을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나는 이 단편을 써야만 작년을 보낼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쓰지 않고는 다른 글을 쓸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신이나 내가 김선호일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언제든 일면식도 없는 사람한테서 난데없는 폭력을 당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소설의 제목을 ‘우리들의 김선호’로 정했을 때, 참 기분이 묘했다. 김선호 위에 우리 이웃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청년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다 쓰고 난 뒤에 알게 된 것이 있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더 써야 하는지, 더 쓰고 싶은지를.
기억할수록 아픈 사람, 김선호의 이야기는 이제 끝이 났다. 그러나 나는 믿고 있다.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한, 그는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인디언들의 잠언처럼.
선호의 방은 내 방 구조와 같았으나 실내 모습은 사뭇 달랐다. 방 하나에 좁은 복도, 딱 한 사람만 들어가도 꽉 차는 주방, 욕실이 있는 9평 빌라라는 구조는 같았다. 그러나 보통의 빌라와 달리 좁은 복도에 싱글 침대와 책상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방에는 벽걸이용 큰 티브이가 있었고 맞은 편에 작은 소파와 옷장이 비치되어 있었다. 창에는 암막 커튼이 설치돼 있었다.
어디다 방음 장치를 해둔 거예요? 하고 우성이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선호가 엷게 웃으며 티브이 뒤쪽 벽에 스티로폼을 붙이고 그 위에다 합판을 덧댄 후 벽지를 발랐어요. 이쪽만 벽지 색깔이 조금 다르잖아요, 했다. 현관문 안쪽과 방문에는 그가 만든 단편영화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온통 눈뿐인 포스터였다.
영화 제목은 ‘雪’이었다. 제목 옆에는 세로로 ‘홀리는 눈’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포스터를 빤히 쳐다보자 겨울 동안 내내 눈이 내리는 곳에서 나고 자라서 이런 다큐 영화를 찍었어요. 고향 사람 중 젊은 분들은 대부분 스키 강사 자격증을 갖고 있어요. 제설차도 거의 다 몰 줄 알고요, 하며 멋쩍게 웃었다.
선호가 제작한 30분가량의 영화는 겨우내 눈 내리는 산간지방에 사는 아버지와 아들의 일상을 담은 영화였다. 제작, 감독, 내레이션까지 모두 선호가 했다. 서사는 단순했다. 사람을 홀릴 만큼 아름다운 설경을 겨우내 담은 거였다. 부자간 대화도 많지 않았다.
“여기 연기자들은 다 전문 배우예요?”
내가 물었을 때, 선호는 겸연쩍은 듯 소리 없이 웃었다. 연주가 설마 가족을 동원한 건 아니죠? 하고 재차 물었을 때 선호는 처음으로 큰 소리로 웃었다. 연기 학원에서 만난 배우 지망생들이에요, 하고 말했을 때 나와 연주는 연기 학원도 다녔어요? 하며 동시에 물었다. 선호는 아주 잠깐요, 연기자들의 호흡도 알아야 하니까요, 하고 답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설경을 빼어나게 잘 담아냈다는 생각을 했다. 눈에 홀려 길을 잃어버린 아들과 아들을 찾으러 눈 속을 헤집고 다니는 아버지. 아버지는 눈구덩이에 빠진 아들을 구하지만 결국 자신은 눈 속에 파묻혀 죽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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