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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소설 단편 당선작

이범기 2025-03-19

ISBN 979-11-93452-94-3(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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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졸작 <물>을 쓰는 내내 불투명한 미안함이 일었다. 내가 뭐라고, 수재민을 가장하여 생전 느껴보지도 못한 타인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지껄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은 궁상스러운 양심의 가책으로 이어지고는 했다. 그러나 ‘느껴보지 못한 타인의 것’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것이 소설이라면, 나는 양심을 잠시 서랍 속에 넣어두고 뻔뻔하게 주인공만큼 두려워하고 쇠약해져야 했다. 그리고 종종 <물>을 흘겨보며 그러한 나의 소개가 유효했나 고민하던 차에, 이번 당선 소식이 그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이 된 듯하여 기뻤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 보잘것없는 문장들을 읽어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물>을 읽어주실 독자님들께도 자리를 빌리는 김에 미리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사카미즈의 맥주가 반 정도 남았을 때, 이목구비가 눈에 확 띄는 중년 백인 남자가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사카미즈는 자동적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사카미즈가 남자를 발견한 것처럼 그도 사카미즈를 한눈에 발견했다. 사카미즈 또한 그 술집 안에서 유일한 동아시아인이었기 때문일 터였다.

남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카미즈가 앉아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옆에 앉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남자의 창백한 얼굴이 그가 입고 있는 새까만 가죽 재킷 때문에 더욱 도드라져 마치 석고상 같았다. 게다가 지방이 아예 없는 사람처럼 피골이 상접하여 얼굴뼈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는 자기를 ‘GH’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고급 위스키를 한 잔 주문하고는 다짜고짜 누가 물어볼 리도 없는 시답잖은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카미즈는 그저 GH가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코카인 해봤나?”

별안간 GH가 그런 질문을 했다. 그러고는 자기가 저질렀던 범죄를 큰 목소리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내연녀와 함께 코카인을 마시다가 의심을 받자 내연녀는 도주하고 자기는 아니라고 잡아떼었다는 내용이었다.

“일단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지.” GH가 어이없다는 듯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도주라니, 그럴 리가. ‘캐시’는 내가 죽였는데.”

사카미즈는 헉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GH가 술냄새가 진동하는 입을 그의 귓가에 갖다 대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증거 인멸의 일환이었지…… 없던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있던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드는 건 기계의 전원 버튼을 검지손가락으로 누르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라고.” 그러더니 GH는 미친 듯이 킬킬거렸다. 그가 살인자임을 알고 나니 사카미즈의 심장이 곧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sweeternity@hanmail.net 

물: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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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1 완성도 있는 작품에 감탄하며 박은비 202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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