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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자며 부활을 꿈꾼다

소설 단편

이철인 2026-02-15

ISBN 979-11-94803-68-3(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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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나는 정인처럼 러브크래프트를 필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째서 러브크래프트를 필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을 필사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고, 그날 바로 종이에 ‘광기의 산맥’의 도입부를 옮겨 적기 시작했다. 어쩌면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듯,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따라 써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러브크래프트를 필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러브크래프트에 대한 해석들도 접하게 되었다. 그중 흥미로웠던 것은 크툴루가 ‘외부에서 온 것’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한다는 해석이었다. 실제로 러브크래프트는 ‘바깥 세계에서 온’ 유색인종들을 병적으로 혐오했으니 꽤나 근거가 있는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나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한창 논란이 되는 젠더 이슈에 러브크래프트적인 관점을 적용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젠더 이슈에 무감각한 남성들에게 페미니즘, 퀴어, 폴리아모리 따위의 말들은 크툴루만큼이나 낯설고 위협적인 존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설령 젠더 이슈에 빠삭한 남성이라도 이론으로만 접했던 내용들이 일상에 들어온다면 우주적 존재와 마주쳤을 때만큼 당혹스럽지 않을까? 이 소설은 이런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나도 젠더 감수성이 높다고 하기에는 민망한 구석이 많다. 글을 쓰면서도, 심지어 글을 다 쓰고 나서도 폴리아모리라는 민감한 이슈를 이런 식으로 다루어도 될까 싶었다. 부디 이 소설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접시를 거의 비우고 술기운이 올라왔을 때, 수아가 말했다.

“우리 폴리아모리 관계를 맺자.”

그 말에 따스하게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식어버렸다. 케니 G의 로맨틱한 연주가 갑자기 음울한 장송곡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밑 빠진 독에 든 물처럼 몸 안에서 빠져나갔다. 폴리아모리라는 말은 커다란 칼을 든 망나니처럼 칼춤을 추며 우리 집에 들어와 나와 수아가 함께한 시간을 찢어발겼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무력감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나는 ‘폴리아모리가 뭔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한남’치고 젠더 감수성이 제법 발달한 나는 폴리아모리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폴리아모리는 상호 합의로 이루어진 비독점적 연애 관계, 쉽게 말해 1:1 관계 외의 파트너도 허용하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폴리아모리 관계를 존중한다는 말도 수아에게 했었던 것 같다. 물론 그 당시 폴리아모리는 나와는 상관없는 먼 얘기였다. 이제 폴리아모리가 내 삶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 이상 나는 존중하는 것 이상의 반응을 보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울 리는 없었다. 나는 울거나 화를 내는 등의 추태를 보이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만 했다.

내가 말했다.

“어떤 놈이야?”

2025-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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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1 이토록 새로운 이상헌 2026-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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