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기와 열기, 벌레와 낙서에 취약한 종이책의 약점을 극복하려면, 울지 않고, 불타지 않고, 찢기지 않고, 닳지 않아야 한다. 함부로 깨뜨릴 수 없는 그라운드룰을 유지한 채 사랑하고, 걱정하고, 축하하고, 이별한다면 일생이 그리 괴롭진 않을 수도 있겠다. 새로운 동료의 등장을 열렬히 환영한다. (김솔 / 심사평 일부)
「우리가 사랑을 멈추는 밤」은 핍진성이 탄탄하다. 말할 것도 없이, 10년 전 황학동 시장의 고물 좌판에서 구입한 주물냄비에 끓인 김치찌개 때문이다. '김치찌개'라는 도구를 활용해 넘치지도, 또 부족하지도 않게 작중인물의 심리를 보여준 재주가 범상치 않다. (김설원 / 심사평 일부)
회사와 집을 오가는 평범한 일상을 오래 한 탓일까, 허구이지만 진실을 탐닉하는 상상, fiction을 꿈꾸어 왔다.
세상에 내 보이는 첫 소설이 온통 허구이다. 남녀 간의 이별도, 주식 투자 실패도, 시댁과의 갈등도, 그런데 그 허구의 세월을 오래 지탱하는 음식, 그리고 사랑이 멈추었지만 정은 멈추지 않은 시간. 차갑게 식은 장면 속에서 기억하고 싶은 온기를 만들고 싶었다.
잠시 멋칫하고 뒤돌아보는 이야기 한 토막이면 족하다. 내 상상 속에 잠시 쉬어가 줄 이가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창밖으로는 저녁의 푸르스름한 어둠이 아파트 단지의 회색 벽면을 타고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가구들이 사라진 거실 벽에 드리운 그림자는 평소보다 길고 짙었다.
“이 집 처음 계약하던 날 기억나? 도배지도 우리가 방산시장까지 가서 직접 골랐잖아.”
서윤이 숟가락을 가만히 내려놓으며 물었다. 놋숟가락이 식탁의 빈 나뭇결에 부딪히며 내는 단조로운 소리가 텅 빈 방 안으로 퍼졌다. 그녀의 시선은 식탁 너머, 거실의 큰 벽면 한구석에 멈춰 있었다.
가구들이 다 빠져나간 거실의 허연 벽에는 네모난 가구 자국들이 희미한 그늘처럼 낙인찍혀 있었다. 그러나 유독 서재 책장이 놓여 있던 자리만큼은 햇볕에 그을리지 않아, 원래 그들이 입주할 때 발랐던 옅은 연두색 벽지가 선명하고 깨끗하게 드러나 있었다. 마치 세월의 때가 타지 않은 과거의 한 조각이 그곳에 박제되어 있는 것처럼.
지훈은 안경테를 손끝으로 조용히 밀어 올렸다.
“연두색이었지. 봄날의 어린 풀잎 같은 색깔이라고 당신이 참 좋아했어. 거실 한쪽을 당신만의 서재로 만들어서 하루 종일 번역 작업을 하고 싶어 했고.”
“그랬지. 어머니가 이 집 집들이하러 오셔서, 그 색깔은 천박하고 촌스럽다며 집안 기운을 다 깎아 먹는 색이라고 소리를 높이기 전까지는.”
서윤의 어조는 호수에 번지는 파문처럼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깊고 서늘한 앙금이 깔려 있었다. 비난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그저 팩트를 기록하는 서기처럼 담담하게 뱉어내는 말투가 오히려 지훈의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지훈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귓가에 오 년 전 그 봄날의 오후가 생생하게 환청처럼 살아 돌아왔다.
집들이 날,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연두색 벽지를 본 어머니의 표정은 마치 오물을 본 것처럼 일그러졌었다. “요즘 젊은 애들은 미적 감각이 없다”, “집안의 기운과 가장의 앞날을 지켜주는 건 정갈한 베이지색이다”, “너희가 아직 철이 없어 모른다”며 목소리를 높이던 어머니. 어머니는 당장 도배사를 다시 불러 벽지를 새로 바르라고 명령하듯 다그쳤고, 서윤은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싱크대 문손잡이를 쥔 채 눈물을 삼켰다.
총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