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가장 친밀한 지옥에서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삼키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기괴하고도 잔혹한 심리소설. 자몽을 까먹는 행위는 사랑의 반복이면서 폭력의 반복이고, 기억의 회복이면서 망각의 실행이다. 자몽’이라는 단일 사물을 통해 삶의 기원과 구원, 사랑과 중독, 폭력과 은폐, 죄의식과 공범성을 동시에 구축해낸 작품.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는가, 돌보면서 조금씩 먹어 치우는가. 이 소설은 묻는다.
나는 나의 태몽을 알지 못한다. 언젠가 부모님께 물어본 적 있었던 것도 같은데, 기억이 흐릿하다. 다시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의 기원을 지금 와서 돌이켜보는 건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 왜일까. 그냥 재미로 넘길 수도 있을 텐데, 신기해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럼에도 두려운 건, 태몽이 나의 운명을 미리 점치는 양 느껴지기 때문일까. 이 소설은 그러한 나의 마음을 일정 부분 대변한다.
나의 태몽은 커다란 과일 열매 안에 갇혀 있다 간신히 빠져나오는 내용이었다. 모친이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 나는 기분이 좋을 때마다 태몽 얘기를 해달라고 했고 모친은 전과 같이 똑같은 발음과 톤, 분위기로 말해주었다. 나는 그때의 달콤함을 잊지 못한다. 지금도.
혀끝으로 입술 끝의 붉은 즙을 핥는다. 맛있다. 나의 태몽을 내가 직접 꾸는 듯한 기분. 아내 현이 그만 먹으라고 할 때까지 자몽을 집어먹는다. 턱에 점점이 튄 자몽즙을 소매로 닦는 순간, 그녀의 손이 내 오른손을 찰싹 때렸다.
현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 눈에서도 붉은 자몽즙이 흐를 것 같다. 피처럼 보이기도 하고. 먹기를 그만두었다. 그녀는 다시, 정신과 약과 과일 자몽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둘은 상극이라 하등 도움 될 게 없고 오히려 더 나빠진다는.
그러한 얘기. 명연설이다.
너무 많이 먹으면 절대 안 돼. 죽을 수도 있어.
현이 말을 덧붙였다.
나는 박수라도 치려다 그녀의 눈치를 보고 그 역시 관두었다. 한동안 시큼달달한 자몽 냄새가 코끝에서 맴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 붙은 방으로 향했다. 곰팡이 핀 책장에 책들이 가득 꽂혀 있고, 그마저도 모자라 바닥에 늘어놓은 책들이 눈에 띄었다. 모조리 다 읽었다. 안 읽은 책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오늘의 독서를 시작하려 책장 사이사이를 훑었다.
뭘 읽을까.
포크너? 솔 벨로? 아베 코보?
맘에 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무엇 하나 내 마음에 들어맞는, 완벽한 소설이란 없었다. 결국 내가 써야겠지. 나는 생각한다. 아직 내 이름으로 발표한 단행본 한 권 없는, 지금은 사라진 한 신인상으로 등단한 나는 스스로가 작가라는 사실에 반신반의한다. 소설을 쓰는 중에만 작가 행세를 할 뿐, 다른 때엔 그로 위장한 그 무엇도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요즈음 절감한다.
책들의 틈을 누비던 눈길이 루쉰의 소설 ‘광인일기’에 가 닿은 찰나였다.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웹북 『사물연습』『것』『퀴어문학은 취급하지 않습니다』『이이』 『공』 『무연고 휴가』『로보, 나를 물어줘』 『비를 사랑하는 감각에 대하여』 『조안 킹 선서』『나오미를 찾아서』 『당신의 공중부양』 『풍선 키우기』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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