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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소설 단편

구효서 2021-07-27

ISBN 979-11-920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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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회생. 무엇보다 이 네 글자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이 단편을 1993년에 썼다. 전업 3년차였다. 문학잡지사를 4년 다니고 그만두었으니까. 소설만 써서 먹고 살자고 맘먹은 게 1991년. 서른네 살 때였다. 큰 아이가 다섯 살, 작은 아이는 뱃속에 있었다. 어떻게 그런 무모한 결정을 했던 건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지만 살아오면서 내가 한 결정들 중 가장 짜릿하고 엑설런트했다고 생각한다.

그 즈음은 모든 게 불확실하던 시절이었다. 소련이 해체되고 민족, 민중, 노동문학의 시대가 저물며 신세대, 오랜지족이라는 말과 함께 대량 소비사회의 징후가 곳곳에서 불온하게 떠돌던 때였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작가들은 미처 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채 이제 무얼 쓸 것인가로 고민만 하다가 약속이나 한 듯 고민하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오죽했으면 ‘소설가 소설’이라는 말이 유행했을까.

이 소설도 그러니까 소설가 소설 중 하나일 것이다. 세상은 둔갑하듯 빠르게 변하고 무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신인 작가인데다, 나는 어설프고 가난한 가장으로 어느새 두 아이의 아비였다.

쓰지 못하면 굶어죽어야 하는 극한을 선택했던 나는 마침내 그 무모함의 대가로 속절없이 병을 얻어 암자에 요양을 가는 신세가 되었다. 소설의 내용에 허구는 별로 없다. 두 살배기 작은 아이가 장난감 낚시를 삼켜 죽다가 살아나는 바람에 일정을 당겨 서울로 올라왔지만 나의 체중은 52킬로그램에서 조금도 불지 않았다. 이듬해 이 작품으로 한국일보 문학상을 받게 되는데 그때 찍힌 사진 속의 몰골이라니.

하지만 문학상을 받은 뒤로 이름이 조금 알려져 이런저런 원고 청탁이 끊이지 않았고 체중도 점차 늘었다. 체중은 먹어야 느는 거라는 걸 그때 절실하게 깨달았다. 먹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써야 한다. 전업 작가들의 모토다. 하여튼 그때 작은 아이도 나도 기사회생한 셈이다.

즐거운 상상은 아니지만 나는 이 작품이 없었다면 작가로서의 내 운명이 어찌되었을까 요즘도 종종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나는 아내에게 담배를 가져오라거나 재떨이를 가져오라거나 신문을 가져오라지 않는다. 이불을 깔아 달라거나 개라거나 하지 않는다. 입었던 옷과 양말 따위를 아무 곳에 벗어놓지 않는다. 동사무소에 가서 등초본을 떼 오라든가 은행에 가 전화 요금을 내라지 않는다. 옥수수 샐러드를 만들어 달라거나 커피를 끓여 달라지 않는다.

그 모든 걸 내가 한다.

내가 하기 싫어하는 건 전화다. 내가 전화라는 걸 처음 사용한 건 중학교 3학년 땐가 그랬다. 상경하기 전까지 나는 전화 없는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무소식에 익숙하고 편하다. 너무 빠르고 많은 정보가 주위에서 왕왕거리면 어디 적막한 곳으로 대뜸 도망치고 싶어진다.

나는 궁금한 걸 참는데 아내는 그렇지 못하다. 거의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면 아내는 말한다. 잘돼가요? 나는 대답한다. 응, 그럭저럭. 어떤 건데? 아내가 다시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아침에 넥타이 매고 출근해서, 점심때 생선초밥을 먹고, 저녁에 한 여자를 강간한 뒤, 집에 와 자살하는 얘기야.”

1957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별명의 달인』 『아닌 계절』 등과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내 목련 한 그루』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타락』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등이 있으며,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 『인생은 깊어간다』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avocado1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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