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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남자의 아내

소설 중편

구효서 2021-07-27

ISBN 979-11-9759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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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출발을 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미당이다. 그의 산문을 읽다가 참을 수 없어서 소설 한 편을 쓴 게 이 작품이다. 단편 하나를 쓸 생각이었는데 길어져서 중편이 됐다.

미당의 스승인 박한영 대종사의 아호가 석전(石顚)이다. 이 아호는 일찍이 추사 김정희가 지어놓았던 것으로, 추사가 친구인 백파 스님에게 건네며 부탁을 했다고 한다. “이걸 자네가 알아서 지금 누구한테 주거나 아니면 후세 영원 속에 부탁해 두었다가 임자가 나오거든 주거나……”

그런데 워낙 좋은 호라서 그랬는지 선뜻 당대의 누구에게 주지 못하고 후대에 남기고 남겨서 마침내 백파 스님의 일곱 번째 법손(法孫)인 박한영 스님한테 와서야 임자를 만나 주어지게 됐다는 얘기다.

미당의 글에는 또 침향(沈香)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육수와 해수가 만나는 고창의 장수강 개펄에 참나무를 묻는데 그것이 몇 백 년이 지나 발견되어 독특한 향의 선운사 침향이 된다는 거였다. 그것을 묻은 사람들은 적어도 자기들의 호사를 위해 그러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

이런 걸 구원성(久遠性)의 세계관이라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으나 나도 나무와 관련된 구원성의 서사를 하나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 소설은 2000년에 <침향>이라는 제목의 장편영화로 제작되었다. 감독은 김수용. 촬영은 정일성. 주연은 이세창, 이정현, 김호정이다.

그녀는 관음전 앞에서 3, 4초 간 머무른 뒤 돌계단을 올라 대웅전 뒤쪽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대웅전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동백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푸르게 빛나는 동백나무 숲 중간중간에 삐죽 키가 큰 감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마다 까치밥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느린 걸음으로 대웅전을 돌아 나왔다. 어쩌면 그녀는 관음전에 볼일이 있어서 들른 게 아닐지도 몰랐다. 내가 천왕문을 막 들어설 때 마침 그녀가 그곳 관음전 앞에 당도하고 있었던 것뿐인지도.

그녀의 긴 머리끝이 이따끔씩 불어오는 바람에 불려 그녀의 뺨이며 이마에 달라붙었다. 그녀는 약지와 새끼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걸음은 한가로웠다. 특별히 볼 일이 있어서 절 나들이를 한 건 아닌지도 몰랐다. 나처럼 그저, 산책을 나온 건 아닐까.

나는 천천히 대웅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진 않았다. 그럴 만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하늘이 더없이 푸르고, 높게 뚫려 있고, 산빛은 자애롭고, 동백나무숲이 숙연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가 될 순 없었다.

그날 그녀의 키는 더욱 커보였다. 2미터 높이의 장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훌쩍 뛰어넘을 것처럼 튼튼하고 늠름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꽃무늬 스란치마가 바람에 나부낄 때마다 그녀의 길고 건강한 두 다리가 양각인 양 드러났다. 어깨를 바로 펴고 팔장을 낀 채 느리고 우아하기까지 한 걸음걸이로 그녀는 영산전이며 명부전을 돌았다. 그녀의 턱은 매우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내가 그녀 쪽을 바라보며 짐짓 부인하고 억누르려 애썼던 감정은, 고백하건대, 또 그 관능적이란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정체불명의 흥분과 충동, 그런 것들이었다.

1957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별명의 달인』 『아닌 계절』 등과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내 목련 한 그루』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타락』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등이 있으며,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 『인생은 깊어간다』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avocado1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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