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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

소설 단편

구효서 2021-08-05

ISBN 979-11-9759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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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만남이 이 소설의 얼개를 이룬다. 소설에서 우연한 만남 따위는 피하는 게 좋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도 우연을 소설에 끌어들인 까닭은 우연이 단지 우연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필연 이외의 것들을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연은 아직 필연성이 발견되지 않은 범주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하니 우연을 잠재적 필연이라고 해 보는 건 어떨지.

필연성이 발견되지 않은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 감각, 계산, 인식, 추론 능력 등의 명백한 한계 때문이다. 사람의 능력 안에서 만들어진 인식체계를 벗어나는 것들을 ‘모를 것’이라든가 ‘우연한 것’이라고 이름 붙이니까. 그런데 그 ‘모를 것’ ‘우연한 것’은 스스로 우리의 인식체계를 벗어난 게 아니라 우리가 다만 아직 다가가지 못한 것이다. 그것들은 그곳에 처음부터 그렇게 ‘엄존’해 있었을 뿐이다. 우리가 쉽게 가 닿을 수 없이 먼 곳에.

그러니까 시간적으로는 선캄브리아기나 중고생대쯤에, 공간적으로는 아시아와 아메리카가 한 몸뚱어리였던 곳에. 멀고멀어서 우리의 감각과 사유가 미처 가 닿지 못할 뿐, 그것들은 여전히 그것들만의 질서로 작동해 왔고 지금도 움직이고 있지 않을까. 그러다가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어느 날 아침 우리의 식탁 위에 물결무늬 풍뎅이로 툭 튀어나와 우리를 깜짝 놀라게도 하고, 어제까지 생판 몰랐던 사람을 보고 오늘 문득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닐지. 이런 상상은 언제나 재미있다.

지나칠 만큼 명료한 기억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쥐어짜도 떠오르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치켜든 하늘 끝으로 까치 따위가 날고 있었다는 건 명료한데 어떻게 해서 그녀와 지리산 정상까지 올랐다가 따로따로 내려오게 되었던 건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함께 탔던 연안부두 유람선의 기억은 선명했다. 그러나 바닷가 민박집에서 그녀가 한밤중에 뛰쳐나갔던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랬다. 기억은 부둣가의 낡은 밧줄들처럼 중간 중간 끊겨 있었다. 이십대의 열정이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기만 하던 것이어서, 그것이 남긴 흔적은 오히려 초라했다.

어째서 헤어지게 되었는지, 그 까닭마저 모르다니. 워낙 감정이 상한 뒤라서 이별의 본질적인 이유들을 꼼꼼히 따져볼 겨를이 없었던 걸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걸 잊는단 말인가.

충혈된 눈처럼 매달려 있던 전봇대의 백열전구와 좁고 어두운 골목은 고호의 어느 밤거리 그림만큼이나 분명하고 인상적인 광경으로 남아 있었다. 시멘트벽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던 그녀의 정수리, 좁은 어깨, 그리고 한겨울밤의 기나긴 침묵은 어제의 일인 것처럼 생생했다. 그러나 어떤 계절에 그녀가 한국을 떠났는지, 그녀가 떠날 때 정길의 사정은 어떠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소소한 말다툼에 삐치고 토라지던 기억들마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헤어지게 된 결정적 이유는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거 참…… 이십년도 훨씬 지난 일들이었으나 정길은 새삼 허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놓고도 사랑했다 할 수 있을까. 그래놓고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던 걸까. 하기야 둘은 너무도 젊고, 너무들 잘났었지, 암. 그 정도라면 그녀를 사랑했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던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그녀와의 기억을 세월에 묻어 버리려 애썼던 거겠지. 그래서 더 빨리, 더 많은 것들이 잊혀진 거겠지. 어쩌면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모든 헤어지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사랑하다 헤어진 것뿐이라고. 아플 만큼 아프다가 결국 세월이 약이 되어 버린 거라고.

1957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별명의 달인』 『아닌 계절』 등과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내 목련 한 그루』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타락』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등이 있으며,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 『인생은 깊어간다』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avocado1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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