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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그저 밤 아니면 낮이고

소설 단편

구효서 2021-08-05

ISBN 979-11-97591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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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 그러나 이미 떠나버린 여자를 왜 끝내 잊지 못할까. 저절로 잊히지 않는 거라면 애써 잊으려 해봤자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애써 잊으려는 행위는 잊으려는 대상을 집요하게 소환하지 않으면 안 되는 행위일 테니까. 잊히면 더는 그리워할 대상이 없어지고 마니, 잊히는 것도 실은 두렵겠지. 그 두려움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사랑을 잊지 못하는 고통보다 훨씬 클지도 모른다. 두려움이든 고통이든 어쨌거나 이러한 남모를 갈등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자칫 자신으로 인한 남의 고통 따위는 나 몰라라 할 수도 있다.

아무렇게나 창밖으로 버려 버린 백합이 꽃잎 끝 한 치도 얼거나 시들지 않고 한겨울의 황량한 화단에서 무려 열흘을 고스란히 견디어낸 아픔. 이와 같은 아픔은 질량 불변의 법칙처럼 우주 가운데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아 자기의 아픔밖에 모르는 자의 아픔에 차곡차곡 덧쌓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잊으려고 해도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에겐 그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 중에 하나였을지 모르나, 그에게는 그 여자가 전부였다. 전부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했던 것은 그 여자와의 섹스가 말할 수 없이 좋았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만이라고 말하고 말기엔 부족함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그는 그 여자의 음성이 좋았고 머리카락이 좋았고 맹장수술 자국이 좋았다. 다 좋았다. 좋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에게는 그 여자가 ‘여자’라는 것의 기준이 되었다. 다리통도 그녀와 다른 여자는 못나 보였고, 비슷하면 신기해 보였다. 걸음걸이며 엉덩이며 눈썹이며 턱까지도 그 여자와 닮거나 그 여자의 스타일에 가까워야 간신히 여자로서 인정되었다. 가슴도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으로, 그것도 호리병 모양새로 늘어진 듯 벌어져야 했고, 무엇보다 유두와 유륜은 아주 옅은 갈색이어야 했고, 엉덩이는 약간 납짝한 쪽이어야 했으며, 목소리는 저음이어야 했다.

그 여자를 만나는 동안 그는 애꿎은 여자들을, 그리고 불특정한 다수의 남자들을 측은하게 여겼다. 길에서나 전철에서나, 여자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찼다. 저들도 애인이나 남편이 있을까? 있겠지. 왜 없겠어. 그래서 저들도 섹스라는 걸 하긴 하겠지. 저런 여자를 여자라고 안는 남자들이 정말로 불쌍해. 어떻게 저런 몸에 자기 몸을 포갤 수 있을까.

그는 그 여자가 자신의 여자라는 게 한없이 행복했고, 그 여자를 포함하고 있는 이 세상이 좋았고 고마웠다. 다른 여자가 아닌 그 여자 위에 자신의 몸을 얹을 수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그런 행운을 허락한 하늘에 감사했다. 전생에 분명 좋은 공덕을 쌓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가 좋아서 섹스가 좋은 건지 섹스가 좋아서 그 여자가 좋은 건지 그는 그게 늘 궁금했다. 세상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가 그거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의 몸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그는 계란이 먼저일까 닭이 먼저일까 하는 식으로 그 문제를 떠올렸다. 풀릴 까닭이 없었다. 다만 어느 것이 먼저든 그는 섹스와 그 여자 모두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행스러워했다. 그처럼 그 여자도 그러길 바랐을 뿐이었다. 그 여자의 말과 표정들로 봐선, 그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그 여자도 그를 좋아하는 것으로 보였다.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언제나 그 여자도 그가 그러는 것처럼 그를 좋아하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그 여자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러한 걱정과 불안과 안타까움들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1957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별명의 달인』 『아닌 계절』 등과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내 목련 한 그루』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타락』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등이 있으며,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 『인생은 깊어간다』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avocado1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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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1 사랑이라는 이름의 아픈 망상 책물고기 202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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