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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의 비밀일기

소설 장편

박상우 2021-08-16

ISBN 979-11-9201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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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오로 신부에게서 처음 이 노트를 건네받았을 때,
그 첫 페이지에는 ‘카인의 비밀일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노트를 성당에 놓고 간 사람의 기록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가시면류관 초상’이었다.
오랜 세월, 죄의 의미가 부화된 결과이리라.

*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카인의 비밀일기’를 ‘가시면류관 초상’으로 승화시킨 게 나의 주관적 과오라는 걸 깨달았다.
그것을 그것 그대로 고스란히 돌려놓아야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의미를 얻게 된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죄와 벌 따위의 3차원적 대칭구조에서는 현상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게 최선이라는 자각!
그렇게 『가시면류관 초상』은 『카인의 비밀일기』가 되었다.

심한 허기가 느껴진다. 막연한 허기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먹고 싶은 음식이 강렬하게 식욕을 자극한다. 후추를 듬뿍 뿌린 참치소스 스파게티. 그것은 물론 아무 곳에서나 사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처음 먹은 것은 카페 ‘카오스’에서였다. 그것은 메뉴에도 없는 음식이었다. 세이턴이라 불리는 주인여자가 특별히 만들어준 그것을 나는 꼭 두 번 먹어본 적이 있다. 처음으로 그것을 먹던 날 나는 그녀와 동침했고, 두 번째 먹던 날은 동침을 요구한 대가로 그녀에게 따귀를 맞았다. 그런 음식의 맛, 어떻게 뇌리에 각인되지 않을 수 있으랴.

세이턴.

그것은 사탄(satan)의 영어식 발음이다.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세이턴이라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처음 흘러나왔을 때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의 입술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이턴이라는 발음에서 개성적인 애칭이나 고유명사의 여운 같은 게 느껴진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의 감상적 무지에 냉혹한 해석을 가했다.

―나는 사탄이야. 하지만 날 사탄이라고 불러선 안 돼. 정확하게 세이턴이라고 불러. 착한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한 위장이라고 생각하면 돼. 착한 사람들을 망가뜨리는 게 내 삶의 유일한 낙이거든.

언제였던가, 함께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그녀가 뱀에 관한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뱀 그림이나 사진을 보면 눈길을 떼지 못했다는 것, 자라면서 뱀 그림을 무척이나 많이 그렸다는 것, 어른이 된 뒤에는 방 안의 유리관 안에다 몇 마리의 뱀을 기른 적도 있었다는 것 등등.

뱀에 관한 그녀의 얘기를 나는 성향이 아니라 단순한 취향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뱀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취향을 비정상적인 성향으로 단정할 이유가 털끝만큼도 없었기 때문이다. 애완견을 좋아하는 것과 뱀을 좋아하는 것, 다를 게 뭔가.

그녀가 성서 「창세기」의 특정 부분을 완벽하게 암송하는 걸 보고 난 뒤부터 나는 그녀의 정신적 배경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뱀을 좋아하는 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종교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섬쩍지근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제12회 이병주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인형의 마을』 『호텔 캘리포니아』 『내 마음의 옥탑방』 『가시면류관 초상』 『운명게임』『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소설가』 『검색어 : 삶의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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