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겨울, 소설이 써지지 않아 차를 몰고 경춘국도를 달렸다. 그러다가 청평댐 근처에서 핸들을 꺾어 댐길을 따라 들어갔다. 눈이 내린 뒤 첫길이라 미끄럽고 위험했는데 어느 정도 들어가자 산중턱 가팔진 곳에 스위스 방갈로형 펜션이 올려다보였다. 그 위치와 건물구조가 너무 특이해 차를 도로 옆에 세워두고 산길을 따라 펜션으로 올라갔다.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불구하고 눈에 덮여 얼어붙은 호반의 전경이 너무 근사하게 내려다보여 도저히 되돌아나올 수 없었다.
그날 밤, 그 펜션 전망 좋은 방에서 벽난로에 고구마를 구워 소주 안주로 먹으며 나는 내내 융프라우를 생각했다. 얼어붙은 청평호를 내려다보며 무슨 이유로 융프라우를 떠올린 것인지 그 인과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난 뒤 실제로 스위스 융프라우에 갔을 때 나는 내내 청평호의 그날 밤을 생각했다. 양자적인 연결과 중첩으로 뭔가 ‘통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얼어붙은 청평호와 융프라우 사이에 인간의 관계, 사랑의 가능성이 놓여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한 화두처럼 여겨지던 시절이라 더욱 그것에 치열하게 도전하고 싶었다. 그 시절의 내출혈과 자멸욕구를 견디고 융프라우에 올랐을 때, 거기서 되짚어본 청평호는 나에게 일종의 판타지였다. 내가 제정신을 차리고 다시 청평호의 그곳에 갔을 때, 내가 머물던 펜션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사라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에 사로잡혀 이 소설을 쓰게 된 것일까.
남은 건 오직 소설뿐!
“…… 보여요?”
“아무것도 안 보여. 보안등도 계단만 비추잖아.”
“그럼 상상해요.”
“그래 그런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저 얼어붙은 호수 밑으로 흐르는 물이 언젠가는 융프라우에도 가고, 아프리카에도 가겠지. 모든 게 돌고 도는 거니까 말이야.”
“그래, 어디선가 그런 글을 읽은 기억이 나.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소가 우주를 수도 없이 순환했을 거라는 말……. 그러니까 상태도 공간도 별로 의미가 없는 거야.”
“할 수 있다면 융프라우에 가닿았으면 좋겠어요.”
“염원하면 이루어지겠지. 이제부터 마음속으로 융프라우, 융프라우, 하고 주문을 외워 봐.”
“결국 모든 게 돌고 도는 과정 중 하나겠죠?”
“그렇겠지. 물이었다가 구름이었다가 얼음이었다가 다시 물이었다가 얼음이었다가 구름이었다가…… 그렇게 끝도 없이…… 상태와 공간만 달라지는 거겠지.”
“융프라우는 어떤 곳일까요?”
“글쎄, 나도 모르지. 가보지 못했으니까.”
“그럼 당신도 지금부터 주문을 외워요. 나와 함께 가야 하니까.”
“알았어…… 그럴게.”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제12회 이병주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인형의 마을』 『호텔 캘리포니아』 『내 마음의 옥탑방』 『가시면류관 초상』 『운명게임』『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소설가』 『검색어 : 삶의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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