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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

소설 단편

구효서 2021-08-16

ISBN 979-11-97591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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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는 밥그릇처럼 생겼다.

언젠가 인사동에 있는 식당 ‘뉘조’에서 밥을 먹었다. 그 식당의 밥그릇과 국그릇은 놋이다. 밥과 국을 떠먹다 보면 숟가락과 젓가락이 놋그릇의 운두에 스치거나 부딪치게 된다. 밥이 줄거나 국이 줄어들수록 맑은 소리가 난다.

“이거 참 악기로 써도 되겠네요.” 라고 했더니 함께 밥을 먹던 도류형(이름은 따로 있지만 걸핏하면 노자와 장자를 끌어다 대서 道類라고 부르게 된)이 “정주라는 거 몰라?”라고 말했다. 밥을 먹고 나서 조계사 근처에서 정주를 샀다. 그때 풍경(風磬)도 하나 샀다.

“그러니까 이 악기는 빈 소리를 내는 거네요. 채우면 소리가 안 나니까 빈 소리. 비어 있는 것의 소리.” 그랬더니 “악기들은 대개 빈 소리인 거 몰라?” 라고 도류형이 되물었다. 말끝마다 “몰라?” 라고 되묻는 게 기분 나빠 복수를 하려고 빈 소리가 아닌 악기가 뭐가 있을까 맹렬하게 생각했다. 생각하다 그만뒀다. 풍경은 나중에 <풍경소리>라는 중편소설이 됐다.

화장실에 다녀온 그는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 앉아 곱창볶음을 먹기 시작했다. 끔찍한 화장실이 떠올라 명희는 얼른 젓가락을 잡지 못했다. 그가 시킨 ‘3인분 같은 2인분’의 곱창이 명희에겐 산더미처럼 느껴졌다. 아버지가 그동안 샀던 건 1인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말이지 그것은 다섯 사람이 먹어도 남을 분량이었다.

천천히 그리고 침착하게 그는 곱창을 먹었다. 공기밥과 곱창이 시나브로 줄어드는 걸 명희는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음식에 마술을 건 걸까. 그것을 씹고 삼키는 동작이 느리고 한가로웠던 것에 비해 밥과 곱창이 없어지는 속도는 빨랐다. 아닌 게 아니라 커다란 산 하나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 같았다.

그에게선 어떤 포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 덩어리에 2,3만원씩이나 하는, 스테이크 전문점의 알량한 고기를 먹고 난 사람처럼 오히려 시쁜 표정이었다.

―좀 더 먹을까요?

그가 물었다. 명희는 깜짝 놀라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식당 앞 자동판매기에서 종이커피를 빼먹는 것으로 그와의 벅찬 저녁 식사는 끝났다.

―괜찮아요?

명희는 입을 조금만 벌려 물었다. 입에서 돼지곱창 냄새가 물큰물큰 풍길 것 같았다. 그는 명희의 물음을 얼른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담배를 사러 가게에 잠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보일 뿐이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천연스럽기까지 한 그를 보면서 명희는 처음으로 이런 사람이라면, 하고 생각했다.

1957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별명의 달인』 『아닌 계절』 등과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내 목련 한 그루』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타락』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등이 있으며,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 『인생은 깊어간다』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avocado1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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