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평생을 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기적이다. 그러나 이처럼 반복되거나 지속되는 흔한 것을 두고 기적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기적이 아닌 것. 그것을 기적으로 만든다면 그 자체가 기적일 테지만, 역시 기적이란 흔치도 쉽지도 않은 거여서 그런 기적이라면 굳이 애써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을까 싶어질 때 터럭보다 가느다란 존재의 균열이 싹튼다.
이 균열 끝판 처리 방식으로서의 두 사례를 한 이야기 속에 담아봤다. 집 앞 슈퍼에 가듯 슬리퍼를 신고 집을 나와 밀라노에 당도한 지 3년이 되도록 남편에게 돌아갈 생각이 없는 여자와, 이탈리아의 광장에다 남편을 버리는 여자의 이야기.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광장의 남자를 묘사할 때, 같은 남자이면서도 나는 어째서 묘한 공범의식을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한 여자는 상황의 전면에 등장시키고 다른 한 여자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걸로 처리한 건 잘한 것 같다.
남자는 그때까지 그곳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시뇨리 광장 꽃무더기 옆에. 생각에 잠긴 단테처럼.
“기다리는 사람이 아직 안 나타났나 보죠?”
여자의 말에는 묘한 확신 같은 게 들어 있었다. 남자의 80퍼센트쯤은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기이한 집중……
남자는 누군가의 기척에 놀랐다기보다, 낯익은 한국어에 놀란 것 같았다.
“구면 아닌가요, 우리?”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웃었다. 여자의 표정은 어느새, 지중해의 바람에 씻긴 하늘만큼이나 개어 있었다. 무언가로 어설프게 고양된 듯한.
남자는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자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들떠 있었다. 우연한 재회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쁨의 발현일까.
놀란 낯을 얼른 수습하며, 남자가 따라 웃었다. 오랫동안 굳어 있던 얼굴에 갑작스럽게 짓는, 썩 자연스럽지 못한 웃음이었다.
“아 예……”
남자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바람이 그들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우드 비 오케이……”
여자가 말했다. 그것이 영어라는 사실을 남자는 2,3초 뒤에야 깨달았다.
“저쪽 바로 가는 게 어떨까요. 보이죠? 카페도 괜찮겠고. 아, 살라 다 테라고 쓰여진 곳도 있네요.”
그리고 여자는 덧붙였다.
“저곳에서라면 이곳이 잘 보일 거예요. 그늘에서 편하게 기다리는 거예요.”
남자는 여자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옛 중앙청 같은 석조건물 1층에 똑같은 크기와 똑같은 글씨체의 간판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Bar, Sandwich, Gelateria, Caffe……
1957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별명의 달인』 『아닌 계절』 등과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내 목련 한 그루』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타락』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등이 있으며,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 『인생은 깊어간다』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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