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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무리반도

소설 중편

박상우 2021-09-02

ISBN 979-11-92011-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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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 사는 동안 아주 깊은 슬럼프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이래도 저래도 글이 안 써지고 정서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도무지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어떤 선배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연애를 하라고 하고, 어떤 동료작가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나는 연애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지 않고 별장을 가진 지인을 만나 술을 마시고 다짜고짜 별장 키를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고성군 산중에 있는 별장에서 두 달을 보내며 미친 듯 주변을 들쑤시고 다녔다. 새벽에 별장을 나서 7번 국도를 타고 포항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가 곧바로 차를 돌려 다시 7번 국도를 타고 고성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미시령, 진부령, 한계령을 오르내리다가 남방한계선을 넘어 통일전망대로 올라가 궁창 같은 바다를 보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지명과 맞닥뜨려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그게 바로 ‘말무리반도’였다. 말무리가 푸른 바다로 달려 나가는 형상! 그곳에서 돌아와 일 년 반이 지난 뒤에 나는 이 소설을 썼고, 그것으로 슬럼프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도 봄이 되면 나는 어김없이 말무리반도를 보러 간다.

누군가, 어둠에 스며든 푸르스름한 달빛을 받으며 길이 끝나는 별장 마당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걸음걸이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해 보였다. 서릿발 같은 긴장감을 느끼며 나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미안해요…… 놀라셨죠?”

“밤길인데…… 내가 뭔가에 홀린 줄 알았어요.”

“예상했던 대로 혼자 술을 드시는군요. 이거요……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손에 흰 종이봉지를 들고 내 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조심스런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소주병과 종이컵을 내려다보고 나서 그녀는 손에 든 종이봉지를 내게 내밀었다. 그것을 건네받아 접은 윗부분을 열자 고소한 냄새와 함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뿐만 아니라 봉지에서 따뜻한 온기까지 느껴져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내용물 하나를 꺼내들었다. 각질처럼 딱딱한 감촉. 미역인가? 내가 그것을 입에 넣고 조금 깨물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마 튀김인데…… 방금 튀겨온 거라서 술안주 하면 좋을 거예요.”

“달밤의 다시마 튀김이라…… 정말 감동적인 맛이로군요.”

모처럼 환하게 웃으며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러고는 앉으라고, 모닥불 옆에 만들어두었던 내 자리를 그녀에게 권하고 다시 마당 가장자리로 가 벽돌 한 장을 들고 왔다. 서서 볼 때는 푸르고 서늘한 기운에 젖어 있었으나 모닥불 옆에 앉은 그녀의 안면에는 어느새 다감한 홍빛이 가득 번져 있었다. 나는 별장 안으로 들어가 다시 한 병의 소주와 종이컵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종이컵을 건네기 전, 다시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소주를 마실 수 있나요?”

“가끔…… 혼자 마셔요.”

“혼자, 어디서 마시죠?”

“밤에 부모님들이 잠들면…… 가게에 있는 소주 한 병을 꺼내 들고 혼자 밖으로 나와요. 집 주변에서 마실 때고 있지만…… 대부분은 이쪽으로 건너와서 마셔요.”

“이쪽이라뇨? 이 별장 마당으로 와서 술을 마신다는 건가요?”

“자주 둘러보고 가긴 했지만, 여기서 술을 마신 적은 없어요. 이곳으로 들어오는 길 옆에 있는 폐가…… 그게 원래 우리 집이었어요. 지금은 외지인에게 팔렸지만 재작년 가을까지 거기 살았었거든요. 그래서 마음이 심란해지면 밤에 이쪽으로 건너와 그 집 우물터에 앉아서 혼자 소주를 마시곤 해요.”

“그 집에 살 때가 좋았었나 보죠?”

“아뇨. 꼭 그런 건 아녜요. 그냥 거기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말을 멈추고 그녀는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손에 든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내가 다시 술병을 내밀자 습기를 머금은 듯한 눈빛으로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빈 종이컵을 내밀어 술을 받은 뒤, 그녀는 자신이 하던 말을 거두고 엉뚱한 질문을 내게 했다.

“이런 곳에 왜 혼자 오셨나요?”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제12회 이병주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인형의 마을』 『호텔 캘리포니아』 『내 마음의 옥탑방』 『가시면류관 초상』 『운명게임』『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소설가』 『검색어 : 삶의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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