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물이 있다. 그는 지구의 서남쪽을 향해 하염없이 걷는다. 가다 쉬고 가다 쉬며 평생을 걷는다. 왜 서남쪽인지 왜 혼자인지 알 수 없으며 그의 이름도 사연도 모른다. 그런 인물을 우연히 적막한 산중에서 잠깐 마주치게 되고, 끝내는 다시 그를 볼 수 없게 된다. 나는 이런 정황을 즐겨 상상한다.
어쩌면 그 상상 자체가 말 그대로 하염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하염없는 그 무언가를 즐기는가 보다. 아니, 내게는 그 하염없음이란 게 없어서, 하염없을 줄 몰라서 상상만이라도 하염없어지고 싶었을 거라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눈앞의 어떤 것에 골몰하거나 집착할 때 우리는 떠날 수 없다. 구름을 따라 무작정 길을 나설 수 없다. 눈앞의 그것이 어쨌거나 귀하디귀한 것이라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닐 바에야 못 떠날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지구의 서남쪽을 향해 평생을 걸었고 지금도 걷고 있는 노인에게는 어쩌면 귀하디귀한 그것이 서남쪽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귀하디귀한 것과 전혀 딴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일테면 ‘어떤 것도 아닌 것’의 지점. 아니면 걷는 일 자체. 그것도 아니라면 떠남.
“산속 두 달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잣거리의 두 달이란 한 회사의 사활이 결판날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입력 인쇄 제본하는 데도 보름은 걸리거든요.”
은근하고 절박한 독촉이었으나 스님은 여전히 연두색 같은 웃음을 웃었다.
“한 회사가 나 하나에만 매달리는 거, 애당초 내가 바랐던 바가 아닐세. 회사든 사람이든 나 하나로 인해 그 생존이 좌우된다면 나로선 큰 죄를 짓는 거나 마찬가지지. 하여튼 회사 사정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니 나도 서둘러 보겠네. 다다음 달이면 얼추 원고가 끝날 거야…….”
“그달 15일까지는 끝내주십시오, 스님…….”
성구는 야쿠자의 꼬붕처럼 어깨를 조아렸다.
“허허, 이거야 원…… 원고 양이나 기한이 문제겠는가…… 내용이 적절해야지……. 그 여사장, 정말 충실한 부하를 두었군.”
스님은 식은 찻잔을 입술로 가져가며 한 손으론 민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저어…….”
성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알았다니까 글쎄, 보름쯤은 앞당길 수 있겠지.”
“그게 아니라 산 노인 말입니다.”
“산 노인?”
스님이 성구를 바라보았다.
“북쪽으로 반시간쯤 내려간 곳 억새 움막에 사는 분이 스님이 글에 쓰셨던 바로 그 산 노인입니까?”
“거길 가봤나?”
“실은 어제 도착했습니다. 스님이 안 계셔서 해 질 때까지 기다리다 노인을 따라가 하룻밤 묵었지요.”
“그랬었구만. 정읍엘 다녀올 일이 있어서 아침에서야 왔네.”
“그분이 정말 어디서 왔는지, 어째서 산속에 혼자 살게 되었는지 모르십니까?”
스님은 말없이 들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푸른 산봉우리 위로 흰 구름덩어리 하나가 한가롭게 지나가고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십니까?”
1957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별명의 달인』 『아닌 계절』 등과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내 목련 한 그루』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타락』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등이 있으며,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 『인생은 깊어간다』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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