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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의 마을

소설 단편

구효서 2021-09-02

ISBN 979-11-9759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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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떤 작가는 수십 수백 편에 달하는 소설 신인상 응모작을 읽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자주 그런 심사에 응하게 된다. 직업 소설가로서 그들 응모작의 문장 한 줄 한 줄에 담긴 분투의 시간을 모를 리 없다. 산 같이 높은 파도로 육박해 오는 그들의 열망에 후끈 더워지지 않을 수 없다. 가슴 뭉클하게 고맙고 이내 또 미안해진다. 나의 일과 생활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분들이기에 감사하고 응원해야 하겠지만 애꿎게도 점수를 매겨 탈락과 당선을 나누어야 하니 미안할 수밖에.

수 세기 동안 문학과 소설이 소멸하지 않고 연명할 수 있었던 데는 어쩌면 훌륭한 작가도 작가려니와 작가가 되려 열정을 쏟은 수많은 지망생들과 그보다 훨씬 많은 이름 없는 애호 독자들의 아낌없는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엄숙한 이바지에 어찌 감히 점수를 매겨 나눌 수 있을까.

이 소설은 은혜를 입어 마음에 차오르는 벅찬 감정을 담아 쓴, 그들 모두에 대한 나의 공경부(恭敬賦)라 할 수 있겠다.

“박정인 씨의 작품은 기초가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역시, 맨 먼저, 혜실 씨의 ‘소감’이 날아왔다. 그것은 날아온 것이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소설에 대해 말할 때는 그렇게까지 느껴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내 소설이었던 것이다. 나를 향해 했던 말이었다. 나와 남의 차이는 그 만큼 확연한 거였다.

“기초라고요?”

사실은, ‘기본이면 기본이지 기초라니요?’ 라고 묻고 싶었다. ‘기초라니까 꼭 무슨 건물 공사장에 와 있는 거 같잖아요’라고 되받고 싶었다. 기본이나 기초나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말의 뜻이 이해됐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초라는 말을 잡고 늘어졌던 것이다. 초장부터 내게서는 ‘비문학적’인 태도가 튀어나온 셈이었다.

“그래요. 소설에는 사람, 장소, 시간, 사건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박정인 씨 소설엔 그게 없잖아요.”

나는 얼른 대꾸하지 못했다. 그게 없었던가? 그리고 소설의 기초가 사람, 장소, 시간, 사건이든가? 그런가? 갑자기 혼돈스러웠다. 소설의 기초가 그녀가 말하는 사람, 장소, 시간, 사건이라 하더라도 내 소설엔 그게 없을 수 없었다. 혼자 양계장을 경영하는 여자가 폐계들의 목을 쳐 공단 닭갈비집으로 납품하는 얘기를 썼으니 그런 게 없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공연히 그런 게 없는 소설을 쓴 사람처럼 말했다.

“그런 게 꼭 있어야 소설이 되는 겁니까?”

내 말끝이 살짝 비틀려 올라갔다. 살짝이었지만 그 느낌은 내가 들어도 완강한 것이었다.

그랬다. 그녀를 제외한 네 사람의 남자가 오래전부터 내게 은근한 걸 기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솔직하고도 자유로울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타지 사람이었고,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그들보단 여러 면에서 혜실 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그들은 ‘객관적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말이라면 자기들 것보단 오해의 소지도 적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어떤 역할인가를 해줄 수 있을 거라고 그들은 믿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나라는 인간의 성품도 분명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나도 싫은 것 앞에서는 싫은 내색을 잘 감추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무슨 말이에요, 그게?”

그녀가 깜짝 놀라 내게 물었다. 흰 얼굴이 푸르게 변했다.

1957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별명의 달인』 『아닌 계절』 등과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내 목련 한 그루』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타락』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등이 있으며,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 『인생은 깊어간다』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avocado1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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