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부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나는 쓰고 있던 철모에 흰 띠를 두르고 총열에 대검을 꽂았다. 계엄군이 된 거였다. 나는 박하사탕 세대였다. 등단작도 광주 이야기였다. 두 번째로 쓴 광주 이야기가 <더 먼 곳에서 돌아오는 여자>였다.
목불인견.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을 때는 가까이 갈 수 없다. ‘먼 곳에서’ 볼 수밖에 없다. 등단작 <마디>도, 이 작품 <먼 곳에서 돌아오는 여자>도 멀리 에돌아 광주에 닿는다.
한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언덕 위 오동나무 그림자에 금을 그으며 내일 나무 그림자가 다시 이 금에 닿을 때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던 청년이 정말로 나타나 주었다면 아이의 운명은 지금의 비극에 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청년은 그날 오지 못했을까. 무엇 때문에.
여자는 공중전화기에 카드를 넣고 열다섯 자리의 숫자를 눌렀다. 그리고 말했다.
“브라이언? 잠 깨워 미안한테…… 하지만 난 지금 말해야겠어.”
한국어가 아니었다.
“그냥 내 말 들어줬음 좋겠어.”
여자의 말은 단호했지만 턱 밑으로 흘러내린 굽은 머리카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넌 항상 그런 식이었지. 하지만 니 평생에 단 한 번쯤은 나 때문에 잠을 깰 수도 있는 것 아냐? 나 돌아가지 않겠어.”
여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시 걸음을 멈추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낯선 외국어가 자동차 소음에 섞여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건 니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잖아. 아니, 넌 지금껏 날 걱정한 적이 없었지. 내가 없으면 니가 먹고살 수 없었을 뿐인 거야. 하지만 다 끝났어. 내가 돌아가든 말든 브라이언, 너완 이제 끝장이야. 하여튼 그 잘난 잠이나 더 푹 자라구…….”
수화기를 움켜쥔 여자의 손이 푸르게 굳었다.
“……오, 천만에. 자는 김에 아주 뒈져버려. 개자식!”
여자는 내던지듯 수화기를 걸고, 돌아서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싯거리며 여자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여자의 눈길을 피해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1957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별명의 달인』 『아닌 계절』 등과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내 목련 한 그루』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타락』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등이 있으며,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 『인생은 깊어간다』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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