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 여의도에 살던 때였다. 나는 여느 날처럼 겨울 이른 아침 집을 나와 한강을 거닐다가 여의나루 역을 향했다. 매서운 강바람이 옷섶을 파고 들어와 살(肉)을 아프게 헤집어댔다. 대중가요 <유정천리>를 입 밖으로 뱉어내었다(나는 혼자 걸을 때 흘러간 유행가를 흥얼거리는 버릇이 있다). 한강변에는 지나는 행인이 없었다. 목청껏 노래를 불러 젖혔다. 2절 중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길은 몇 굽이냐?” 노랫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올 때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주위를 돌아보았다. 나는 엉엉 울면서 지하철역을 향해 발걸음을 놀렸다. 노래가 끝나면 다시 불렀다. 강바람이 춥지 않고 시원했다.
나는 왜 이 노래를 부르면서 왈칵, 울음을 쏟아냈을까? 무심결에 입 밖으로 흘러나온 노랫말이, 그때까지 시난고난 살아온 편력을 순간적으로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으리라. 물론 이 행위는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어디까지나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무의식의 발로였다. 살다보면 이렇듯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자신을 흘리고 생의 전라(全裸)와 치부를 가감 없이 노출시키는 때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무조건적인 생의 낭비나 소모만은 아니다. 때에 따라 누적된 감정은 배설을 필요로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들은 대개가 어릴 적 엄니에게서 배운 것들이다. 생활에서 장애를 겪을 때마다 엄니에게서 배운 노래를 부르는 게 버릇이 되어버렸다. 나의 글쓰기는 군 제대 후 복학생이 되었을 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문자 행위로서의 시 쓰기가 아닌 생활로서의 시 쓰기는 이미 그 어린 시절 엄니와 처녀들이 떼 창으로 부르던 노래들을 따라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절 가락에 실린 노랫말의 청승과 서러움은 고스란히 유전자처럼 내 글의 정서로 전이되었다.
얼마 전 춘사(椿事)를 겪었다. 음악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자 하는 아들과의 오랜 불화로 인해 크게 다투면서 해서는 안 될 폭언에 손찌검까지 하게 됐다. 만취한 상태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자책, 자괴, 자학으로 몇날 며칠을 불면에 시달려야 했고 달포가량 지독하게 후유증을 앓았다. 사고를 저지른 다음날 나는 아들 볼 면목이 없어 아내의 양해를 구한 다음 당분간 가족과 떨어져 살기로 하고 마포 집에서 멀리 떨어진 노원구 중계동 불암산 자락에 임시 거처를 구했다. 조석으로 산을 오르내리며, 평생 오체투지로 살아오면서 불지불식간 내 안쪽에 고인 불안과 울분을 토해 내고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위해 일부러 산 근방에 거처를 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산을 오르고 내리는 동안만은 산의 향기에 취해 마음의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안은 금세 휘발돼 늦은 밤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무늬 없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온갖 상념과 회한이 들끓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에 이를 수 있을까? 다 큰 자식과 불화하여 멀쩡한 집 놔두고 집 밖에 집을 구해 홀로 방에 누워 있자니 바위처럼 무거운 죄가 가슴을 짓눌렀다. 헛살았다, 헛살았다. 돌아가신 엄니의 한숨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충남 부여 출생
1983년 『삶의 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섣달 그믐』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슬픔은 어깨로 운다』 외, 시선집 『얼굴』 외, 산문집 『쉼표처럼 살고 싶다』 등 출간
소월시문학상, 유심작품상 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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