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살에 고향인 강화도를 떠났다. 그때는 강화도가 다리 하나 없던 섬이었다. 바지선이 버스를 싣고 강화와 김포 사이의 염하를 건넜다.
15년 동안 새겨진 고향의 기억은 150년 동안 써도 마르지 않을 화수분이다. 150년을 산다는 것은 감히 바랄 수 없는 일이므로 평생을 쓰고도 남을 이야기라고 해야겠다.
고향은 부모 형제와 동격이다. 고향 얘기를 하자면 가족 이야기를 안 할 수 없고, 가족 얘기를 하자면 고향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내 존재의 모태와도 같아서 고향과 가족에 대해 쓸라치면 마냥 애틋해질 수밖에 없다.
난 그 애틋함을 좋아한다. 이유는 따질 필요 없다. 애틋할 때 글이 가장 잘 써질 뿐만 아니라 밥벌이 글로 피로해진 마음까지 위로해 준다.
고단하고 외로울 때 가장 생각나는 것. 그게 확실하고 많고 좋고 끊이지 않아서 나는 막내답게 일부러 고단하고 외로운 척 막 엄살을 떨기도 한다. 투정을 부리면 주어지던 어머니의 사탕처럼, 엄살을 떨고 나면 애틋한 글이 하나 나오니까.
나의 아버지는 빨갱이도 아니었고 친일파도 아니었다. 나는 그게 불만이었다.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됐어야 했던 게 아닌가. 왜 나의 아버지는 빨갱이도 친일파도 못 되었다는 말인가.
중학생 때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5년 전 어느 문학포럼에 참가했다가 문득 중학생 때의 그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이 모인 자리에서(점잖은 말들을 사용했지만) 또 그 케케묵은 친일파 빨갱이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케케묵은 논쟁이 아니었다. 케케묵었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져 새로울 것이 없거나 쓸모가 없다는 뜻인데 빨갱이 친일파 논쟁은 여전히 싱싱하고 팔팔했다. 분단 전후부터 시작된 대립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밤 아니면 낮이고 여자 아니면 남자인데, 그렇게 보면 우리 세상은 빨갱이 아니면 친일파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어쩌자고 나의 아버지는 빨갱이도 아니고 친일파도 아니었단 말인가. 아니고 싶어서 아니었을까. 되고 싶어도 못 됐던 건 아니었을까.
중학생 때 그런 생각을 몹시 했던 건 아버지가 싫어서였다. 가장 가까이서 먹고 자는 사람이어서 더 그랬겠지만 나는 세상에서 아버지가 제일 싫었다. 가난하고 무식하고 무능하면서 사납기만 한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난 게 원망스러웠다. 나는 나의 꿈과 희망이 막막해질 때마다 있는 힘껏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러다 나의 꿈과 희망이 아예 ‘아버지처럼 되지 않는 것’이 되었다. 내가 그랬다는 걸, 아버지도 아셨을까. 아셨겠지.
1957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별명의 달인』 『아닌 계절』 등과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내 목련 한 그루』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타락』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등이 있으며,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 『인생은 깊어간다』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avocado105@hanmail.net
효서야 바다 보아라 아버지의 웃음 그게 사랑이었을까 언제 다시 고깃배 뜰까 별립이고 싶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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