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란 참 괴상한 직업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걸 직업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쓰면 돈을 더 꾸준히 잘 벌겠지, 라고 생각하며 글을 쓰는 작가는 별로 없을 것이다. 쓰고 싶은 것을 열심히 썼을 뿐인데 대박 나는 경우는 있어도.
매번 세상에 없는 허구를 만들어내는 일이 쉽지 않다. 유사 이래 지금까지 지구상의 어디에도 없었던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내가 쓴 소설은 물론이요 내가 읽지 못한 숱한 소설과도 달라야 한다. 이거 혹시 누구의 이런저런 소설을 읽고 흉내 낸 거 아냐? 라며 내용의 유사성을 지적할 때 아니라고 해 봐야 소용이 없다. 그러니 소설가라는 게 고단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다.
픽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고는 해도 현실과 뚜렷한 경계를 지을 수 없다 보니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이 불분명해질뿐더러 때로는 전도되기까지 한다.
가장 괴상한 것은 내가 만든 말 내가 쓴 글 내가 그려낸 세계에 내가 온전히 갇혀 옴쭉달싹 못하게 되는 경우다. 내가 쓴 글들은 활자와 지면을 타고 밖으로 나가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감동을 주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끝내 돌아와 나를 옭는 오라가 된다. 붉은 오라라면 눈으로도 볼 수 있고 통증과 압박감에 저항이라도 해보겠지만 나의 말 나의 글은 소리 없는 살인자처럼 아무 저항 없이 침투해 들어와 스스로 신이 되고 나는 그것을 숭배한다.
글을 쓰며 시시때때로 진저리친다. 내 말과 글을 혹독하게 의심하고 그에 저항하며 적대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저항기를 또 글로 남기고야 마니 이처럼 참담할 데가 없다. 작가의 말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미인? 이 말 갖고 될까?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여성이라면 오로지 엄마 말고는 윤정희밖에 없었다. 막내여서 엄마는 내 우주의 주인. 그리고 배우 윤정희는 세상에서 최고로 예쁜 사람. 그렇다면 친구의 어머니는? 미안해요, 엄마, 그리고 나의 윤정희 선생님.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랬는걸요. 친구의 어머니는 뭐랄까, 음, 초미인이었고, 나는 슬슬 나의 우주를 엄마의 허락 없이 그녀에게 은밀히 개방하고 싶었던 것.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실은 지금도 제대로 말할 자신이 없다. “이름이 효서라고 했니?” 친구 어머니의 이 한마디로 나는 이미 할 말을 다 잃었다. 아는가? 지금은 듣기 힘들게 된 완벽한 서울 태생의 서울 말투를. 부드럽고 기품이 있어서, 어? 저건, 텔레비전에서나 듣던 가회동 마님의 음색과 억양이 아닌가, 했다. 시골의 무학 농부로 50년을 산 엄마한테는 거듭 미안하지만 나는 그때 여신을 만나고 있다고 단정했더랬다.
외모만 갖고 말하는 게 아니다.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친구 어머니에게서 끼쳐오는 기운이라는 것이 오금을 못 펴게 했다. 요즘은 아우라라고 하나. 하여튼 분위기가 정말……. 아, 내가 사춘기가 늦었었나? 고2. 그럴지도.
1957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별명의 달인』 『아닌 계절』 등과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내 목련 한 그루』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타락』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등이 있으며,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 『인생은 깊어간다』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avocado1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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