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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작가가 아니다

에세이 선택안함

김솔 2022-02-11

ISBN 979-11-922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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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새로운 글을 쓸 때마다 다른 글을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그래서 지금 쓰고 있는 글을 어서 끝내자고 조바심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지금 쓰고 있는 글이나 앞으로 쓰게 될 글을 한꺼번에 망치곤 하지요. 그래서 앞으로 쓰게 될 작품이 지금까지 쓴 작품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가장 나중에 쓴 작품이 저의 대표작이 되는 일도 없겠지요. 여전히 독해가 어렵고 독서의 재미를 찾을 수 없다가도 이런 글 정도면 나는 발가락만으로 쓸 수 있겠다고 독자들을 유혹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그러니까 제가 다른 밥벌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서점보다는 도서관에 더 오래 보관되는 글들을 열심히 써 볼 작정입니다. 그렇다고 서점용 책과 도서관용 책이 서로 다르다는 뜻은 아니고, 도서관용 책이 서점용 책들보다 더 가치 있다는 뜻도 아니며, 단지 도서관의 책들은 독자들이 공짜로 읽을 수 있으니까, 설령 자신의 독서편력에 부합하지 않은 책들이라도 단지 오래되고 소외됐다는 이유만으로 잠시 시간을 내어주지 않을까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 출판되지 않은 책이고 발견된 적 없는 광물이며 태어난 적 없는 그림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고요할 수가 없다.

작가는 현실과 과거의 노예가 아니라 꿈과 미래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

추억의 무게가 나이라면 나는 아마 천 년쯤 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추억이라는 것이 대개는 몇 권의 책과 몇 대의 악기와 몇 병의 술과 몇 가지의 가족력과 대만제 싸구려 시계로부터 잉태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에 남길 수 있는 유전자라곤 종이 위에 알리바이처럼 조금 남아 있는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이길 바랐다.

누구에게나 한때 정복할 수 없는 애인이 있었듯이, 전복과 일탈과 슬픔과 자해만이 생의 유일한 목적이던 시절에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작가란 글을 쓰는 자가 아니라 글을 쓰려고 방황하는 자였다. 마치 무정란을 품고 있는 수탉처럼. 그래서 나는 떠돌이 개처럼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고 아무에게나 고개를 조아리고 처마 밑에 쓰러져서 나비의 꿈을 꾸었다. 나는 늙게 되는 게 아니라 낡게 되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중에 바람이 될 것이고 바람이 죽으면 나무가 될 것이라고. 가령 은사시나무나 닥나무 같은.

최근 아주 근사한 단어를 발견했다.

시참詩讖: 자기가 지은 시가 우연히 자신의 미래를 예언한 것과 같이 되는 일

어느 새벽엔 코피가 나고 요기尿氣를 느꼈다. 어느 자리 위에선 마른기침을 했고 누구와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침을 흘렸다. 술을 마시고 난 다음날엔 항문에서 피가 떨어질 것 같아 두려웠다. 눈물은 가장 나중에 아주 조금 흘러 나왔으나 기갈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가뭄 동안 틈은 안으로부터 자라났다. 그렇다고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코피가 나고 요기를 느낀 어느 새벽엔 어떤 이의 이름 위에서 어떤 생각이 흘러나왔고 마른기침을 하다가 이가 시릴 정도로 외로움을 느꼈으며 침을 흘린 후에 갈라진 혀에서 뼈가 자라났다. 항문이 조금만 버텨준다면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완성될 것이고 환희의 심장에서도 가끔은 눈물이 흘러나오니까 손가락이 젖는 날도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욕망의 뜨거운 태양 아래 가뭄 아닌 적도 있었던가.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암스테르담 가라지세일 두번째』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 『망상, 어語』 『유럽식 독서법』, 장편소설로 『너도밤나무 바이러스』 『보편적 정신』 『마카로니 프로젝트』 『모든 곳에 존재하는 로마니의 황제 퀴에크』 『부다페스트 이야기』가 있다. 문지문학상, 김준성문학상,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nyxo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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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의 천성적 진솔함에 눈물이 난다 책물고기 202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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