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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망하고 남은 것들

에세이 선택안함

이밤 2023-08-20

ISBN 979-11-92211-91-6(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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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목 짓는 걸 무척 어려워하는 인간 중 하나인데, 이 글은 마치 ‘에세이의 신’이 점지라도 해준 듯 제목이 먼저 찾아왔다. 그때 K와 나는 밀푀유나베가 끓고 있는 냄비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생각났어.”
“뭔데?”
“「사랑이 망하고 남은 것들」.”
“오.”
“괜찮지?”
“응, 근데 사랑이 망하면 뭐가 남아?”
근 일 년째 자의식 과잉에 젖어 있는 소설가답게 제법 그럴듯한 대사를 건네고 싶었으나……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게 고작이었다.
“망한 내가 남지.”

숱하게 망하고 잃고 버려진 후에도 여기, 남은 나를 기록할 수 있어 기쁘고 또 감사하다. 우매한 나는 늘 쓰면서 배운다. 이번에도 그랬다. 캄캄한 시간을 건너오는 동안에도 말들을 벼리며 견뎠고, 폐허에서 주운 것들은 끝내 16,178음절의 세계가 됐다.

생이란 게 결국 망한 나와 덜 망한 내가 벌이는 제로섬 게임이라면, 앞으로는 조금 더 기꺼운 마음으로 망한 나를 응원하겠다. 나의 망함에 예의를 갖추겠다.

모두의 안녕과 건투를 빈다.

마지막으로 샤먼의 방문을 두드린 건 지난여름이었다. 난데없는 코비드 양성 판정으로 자가 격리 상태에 놓여 있던 차였다.

“인생이 영 안 풀리네. 점이라도 볼까 봐.”

“얼마 전에 본 데 있는데, 알려줘요?”

“당장 내놔.”

카톡으로 사주를 봐주는 분이라 했다.

“진짜 용해요. 얼굴도 안 보고 척척 맞추니까 더 신기하더라고요.”

L에게 링크를 받은 다음 날 부리나케 상담을 요청했다. 모바일 뱅킹으로 복채를 전송한 뒤 생년월일시를 넘겼다.

—사주 확인되었습니다. 정리하여 보겠습니다.

남들보다 고통이 많으며 사고수 및 힘든 일이 왕왕 보인다 했다. 역마살이 좀 있어 삼십 대에는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니실 거고. 혈압과 당뇨 질환에 유의하셔야 하며 빨간색과 노란색을 가까이하면 좋으시고. 베란다에 모래를 깔아 두거나 집터를 산 주변으로 잡는 것을 고려해보시고. 연애 상대를 보는 눈은 영 없으신 편이니 사람을 만날 때 반드시 유념하셔야 하고……

말풍선을 가만 보는데 영 감질났다. 내가 바란 건 수정 구슬로 본 정확한 미래였다. 그러니까 이곳부터 죽음까지 뻗어 있을 나의 연대기를 수직선 위에 명쾌하게 그려주는 것. 도사님, 제 인생의 청사진을 보여주시겠어요? 거기까지 생각하자 헛웃음이 났다.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어지는 점괘 역시 신당을 쏘다니며 족히 스무 번은 더 들었던 이야기의 변주였다. 어쩐지 더 갑갑해졌다.

—더 궁금한 사안이나 특별한 사연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나는 승부수를 던져보기로 했다.

—제가 최근에 한 공모전에 당선이 돼서 소설을 쓰게 됐거든요. 이게 저한테 얼마나 잘 맞고 또 잘할 수 있을지……

억겁 같은 7분이 흘렀다. 장문의 답변이 도착했고, 요약하자면 이랬다.

—예술가로 아주 큰 성과를 이루시겠어요. 36세 이후에 큰 빛을 볼 거로 기대해봅니다.

빛이라. 깜빡거리던 마음에 그제야 불이 좀 켜진 것 같았다. 이제야 돈값을 하는군. 그가 내 사주팔자의 어느 행간에서 ‘성공한 예술가’라는 대목을 읽어냈는지 모른다. 어쩌면 오독인지도 모르지. 한 친구는 이렇게 묻기도 했다. “그냥 네가 듣고 싶은 말만 들은 거 아냐?” 맞는 말이었으나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믿음이다. 요한계시록 1장 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2022-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2024 종이책『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공저) 출간​

웹북 『초대』 『사랑이 망하고 남은 것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다시 흐른다』​출간 

 

nachtbruise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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