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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2025-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2025-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명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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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이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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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탄생: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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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5동 1201호: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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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농장: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주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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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박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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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김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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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운이 좋아야 하나?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독서를 할 때, 작가의 성숙한 사유 그대로가 위로가 될 때가 있다.운은 무엇인가. 정리할 수는 없지만, 결과에 따라 좋고 나쁨이 정의되는 것은 확실하다. 그게 제아무리 모호하더라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답은 반대의 가능성을 동반한다. 그게 좋은 쪽의 상상이든, 나쁜 쪽의 상상이든, 그 자체는 어둠인지도 모른다고, 이 소설은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걸 그저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 삶인지도 모른다고.<운이 좋았네요>는 사고를 시작으로 긴장감 있게 뻗는 서사와 적절한 반전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단편이었다. 아이의 사건을 중심으로, 그 내막의 가능성을 나열한다. 장인, 아내, 주인공, 장모, 돌보미 등은 서로를 탓하고 있다. 네가 그랬으면, 그때 그랬다면, 하며. 작가는 그런 나열의 공법으로 의식을 뚜렷이 하다가, 반전으로 주제를 관철시킨다. 끝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와 주인공이 동일시되며, 하나의 우아한 이미지로 근사한 형상화를 달성한다.불행을 마주한 인간이라면 이런 수많은 가정의 나열을 경험하지 않은 이가 없을 터이다. 그때 내가 이랬다면, 그때 누가 그랬다면, 하늘이 어땠다면, 운이 좋았다면, 지금이 조금은 나았을까, 하고. 그런 가정은 미련과 다를 바 없이 유해하다. 아이 혹은 트럭 기사의 끝처럼, 인과는 결과에 의존할 뿐이니까.그렇다면 그런 삶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낚싯대를 던져 놓고 앉아 있던 아버지의 이미지가 강렬히 남는다. 그는 정적 속에서 무언가를 헤아리고 있었던 걸까. 그건 어떤 불확실성을 대하는 삶의 태도를 은유하고 있지 않나 가늠해 본다. 운이 좋았다, 운이 나빴다, 로 정리되는 삶이 어디 있는가. 과거 가정의 상상으로 갉아 먹히는 현재를 누가 원하겠는가. 가늠하고, 상상하고, 운 따위로 슬퍼하기에는, 우리 모두 실천하는 삶이 치열하다.끝에는 독자인 나도 주인공 찬영처럼 비로소 궁금해졌다. 어둠 속 아버지가 보던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작가에게 제대로 전달받았다. 배울 수 있었다. 어떤 지나간 불확실성에 의존하기에는 삶은 너무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사실을.아름다운 사유가, 소중한 위로가 아닐 수 없다. 구름
나도 밥먹고 사는 인간입니다 <나도 똑같이 밥 먹고 사는 인간입니다.>        직장인의 애환이 담긴 소설은 처음 읽었다. 참치집 회식을 하는 풍경이나 개개인의 직무에 어울리는 말투와 대화들, 신선하고 잘 읽히고 정말 그럴 것 같아서 히죽 거리며 읽었다.     주인공 유란은 계약직이다. 그녀는 회식에 목숨을 거는 듯 식탐이 있다. 지난 소고기 회식에서 몸무게 내기를 해, 체중계를 챙겨 회식을 향한다는 그 장면도 웃프다.     50만원 내기에서 이긴 유란은 대뱃살 한 점이 남은 상황에서 웃음꺼리가 되어도 스스로를 가오나시라고 하며 먹는다. 그녀에게 그 한 점은 단순한 참치가 아니다. 스스로 먹는 것의 주인이 되어, 누군가가 먹어도 되는 마지막 한 점이라면, 지위고하를 떠나서 먼저 먹겠다는 의지다. 통쾌하다 못해 감동적이었다.     유란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점심은 없습니다, 라는 메모가 분명, 직급의 차이, 사회에서의 불이익 같은 제도의 문제다. 하지만, 내기에서 이긴 사실로 유란의 성공이라고 본다. 점심이라는 의미가 계약직에게 불리한 차별라는 걸 안다. 하지만 대뱃살 한 점을 먹는 유란, 몸무게 다이어트에서 이긴 유란, 나는 그녀가 당당한 삶을 산다고 믿는다.     시대에 뒤쳐진 조직의 제도가 문제지 유란은 결코 뒤처지거나 부족하지 않다. 그녀는 차별 받을 수 없고 억눌러질 수 없는 한 인간인 것이다.     “나도 똑같이 밥 먹고 삽니다.”    유란이 소리치는 소설이다.  후기: 잘 쓴 소설, 재미있는 소설, 뭐라도 좋지만, 소설을 읽고 이렇게 푹 빠져 보긴 오랜만인 듯 합니다. 강추합니다. 혜섬
부딪는 분노와 애도마저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읽은 후 대단히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는 소설이 있다. 막대한 에너지들의 부딪힘, 악의, 슬픔, 열의, 그것에 독자로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어 다음날 혹 그다음 날까지 남는 충격적인 소설, <노적가리 판타지>다.장애가 있는 성불구 동생을 둔 주인공과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동생과 결혼을 약속한 목사의 딸. 둘은 밀회를 즐기다가 동생의 자살을 마주한다. 이 소설은 설정부터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가장 격한 감정과 부딪힘을 내포하고 있다.흥미진진하고도 무서운 서사와 별개로, 작가의 전략은 한 단계 위에 있다. 이런 믿을 수 없을 만큼 비극적인 현실은 이야기이다. 작가는 그런 이야기를 통해 소설이란 환상의 공간으로 독자를 안내하고, 그게 곧 현실이라고 직시하게 만든 뒤, 다시 환상으로 빠져나간다. 소설이기 이전에, 그게 뒤엉켜 사는 인간사이고,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자연이라고, 구조부터 주제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그곳에 깊은 진실이 하나 숨어 있다. 배역. 삶은 그게 어떤 형태이든 다만 흘러가는 것이고, 겪는 것이다. 결론은 없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판타지와 같은 이야기니까. 우리는 어느 삶의 시나리오 속 하나의 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소설은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섬뜩한 질문이 솟아오른다.그렇다면, 소설 속 주인공이 느끼는 애도와 슬픔마저 연기인가?그런 인식에 다다른 순간, 소설의 에너지는 그대로 독자에게 전이된다. 나 역시 그런가. 슬픔을 연기하고 있나. 열의를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쉽게 떨쳐낼 수 없는 이야기의 힘이었다.한데 며칠이 지나고 보니, 이런 비극적 소설이 위로로 다가오는 건 왜일까. 아마 주인공이 ‘옛날에,’ ‘옛날에,’하며 이야기의 공간으로 사라지는 마무리가 이유인 듯하다.어떤 비극도 닥칠 수 있다. 우리는 애도마저 연기해야 하는 끔찍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허나 그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이다. 그 누구도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정의되지 않고, 결말은 없다.없는 결말은 반대로 무한한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비극이든, 행운이든 ‘나’는 흔들릴 이유가 없다. 시나리오는 흘러가는 중이다. 배우가 인물로 인해 아플 이유는 없지 않은가.‘다만 겪는 과정’이라는 미치도록 성숙하고, 성숙하기에 아프기도 한 위로는 진귀한 독서 경험이었다. 츠지
무감각이라는 허방 위에 서 있는 우리에게 싱크홀 사고로 남편 휘를 잃은 주인공은 그와 함께 살기 위한 준비를 했던 시골집에서 홀로 살고 있다.오래되고 위태로운 그 집은 허방 난 도로와 인접해 있어, 큰 차가 허방을 치고 지나갈 때마다 위태롭게 흔들리고 주인공의 일상을 자꾸 흔든다.민원을 부탁한 마을 이장은 '그 곳은 가정집보단 기사 식당 하기 좋다'며, 집을 팔라고 은근히 압박해오는 상황.무심하고 무감각한, 거대한 안전불감증 같은 허방에 흙을 채우고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주인공의 결심을 응원하며 독서를 마쳤다.'그런 어처구니 없는 사고는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남에게만 일어나라는 법도 없다. 유난스럽게 굴지 말자. 다들 이런 사연 하나쯤은 튀어 오르지 않게 눌러두고 별일 아니라는 듯 살아간다. 부서진 얼굴로 휘가 아픔 없이 나를 본다. 아무것도 모른 척 웃는 얼굴을 집게 손가락으로 사납게 문지른다. 잔금이 간 얼굴에서 그날처럼 피가 흐른다.' - 작품 중에서 작품 속에는 우리 사회를 관통한 여러 비극적인 참사들을 나열하며, 그 사건들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유난스럽지 않으려는'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남편 휘를 잃은 주인공의 슬픔과 고통이 어떻게 '유난'이 될 수 있는가. 그걸 스스로 '유난'이라고 자조하며, '다들 이런 사연 하나쯤 눌러두고 별일 아니라는 듯 살아간다'며 스스로를 억누를 수 있는가.주인공이 감당해야 할 현실을 묘사하는 이 문장에서 먹먹해지고 말았다. 담담하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의 태도에서 역설적으로 그 '유난스럽지 않다는 듯 행동하는 사람들'의 무심함과 무감각을 꼬집는 것 같았다.도로에 난 허방에 부딛쳐 오는 차들 때문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집에 사는 주인공의 민원 같은 건 문제도 아니라는 듯 '기사 식당 하면 딱 좋을 자리'라며 집을 팔라고 종용하는 마을 이장 같은 사람들을. 작가는 '언제 갑자기 우리 삶을 푹 꺼지게 만들지 모를 사고들이 정말 남의 일 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균열 속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섬세하게 조명하고 불편과 불통의 감각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마지막, 주인공이 결심하고 움직이는 장면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무감각이라는 허방 안에 서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작가의 메세지를 잘 포착해야 할 것 같다. 허우적거리면서도 끝까지 이야기를 완성해준 작가에게 감사와 존경을 전한다.   박은비
우리는 모두 길 위에서 되도록배제했으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고급하게 잘 쓰인 잔잔한 소설은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천천히 산책하듯 독자에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길 위에서>의 서사를 정리하자면, 무척 간단하다. 고독한 여인이 길 위에선 이야기이다. 걷는다는 건 무엇일까. 일축할 수 없지만, 널널한 표현으로 대체해 본다. 살아가는 것.어느 삶의 풍경화처럼 다가오는 이 소설은 구별된 자기만의 매력으로 가득하다.홀로 미용실을 운영하며 딸아이를 키우는 주인공이 어떤 힘듦에 갇혀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달받지 않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구구절절 토로하지 않는다. 작가도 그 힘듦을 선정적으로 보여 주려 하지 않는다. 납득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차라리 담담한 듯 보이는 주인공에 절로 마음이 아파져 온다. 그녀의 무게를 전달받게 된다.주인공의 무게를 죄책감, 외로움, 부담, 노릇 등의 단어로 일축할 수 있을까. 그건 어려울 것 같다. 그녀의 무게도, 우리 모두의 개인적 무게도 그리 간단히 해석될 것이 아니다.그럼에도 작가가 길 위에서 펼치는 섬세한 부딪힘과 결말로, 나는 길 위에 선 내게 다가오는 여러 이름 붙이지 못할 감정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이 소설은 간단히 해석될 수 없기에, 내 개인적인 경험들이 파고들 수많은 공간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게 작가의 배려이자, 마음씨이며, 지향하는 어떤 세계관이라고 여겨진 순간, 이런 작가만의 톤과 매너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개인적으로 주인공을 두 가지 방향으로 응원하게 되었는데, 박 관장과의 관계, 엄마로서의 미래이다. 하지만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런 잔잔한 소설의 여운은 앞으로의 태도를 말해 주는 데 있다.‘괜찮아요.’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마지막 문장.모두 길 위에선 우리 모두 중 ‘지금 괜찮아요?’에 확실히 괜찮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최소한 난 그렇지 못하다. 그럼에도 그런 태도가 가야만 하는 방향을 <길 위에서>는 섬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것만으로 큰 위로를 받았다. minim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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