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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2025-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명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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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이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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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탄생: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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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5동 1201호: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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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농장: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주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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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박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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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김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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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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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물이 나를 물었다      [스포일러 주의] 소설 내용이 포함된 리뷰입니다.소설 제목이 ‘바다’가 아니라 「물」인 이유를 곰곰 생각하며 읽었습니다.일본인 스쿠버 다이버 사카미즈가 자기 일터인 인도네시아의 바다에서 겪은 사연. 이것이 「물」의 주된 이야기입니다. ‘일본인’과 ‘인도네시아’의 등장이 자연스럽게 ‘쓰나미’(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2004년 인도양 지진해일)라는 세 글자를 떠올리게 하여, 핍진성보다는 환상성을 좀더 부각한 소설의 세계에 독자들이 몰입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사카미즈의 사연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아파트 6층 높이의 해일이 연안을 덮쳐 인명 피해를 일으킨다, 바닷속에서 근무 중이던 다이버는 천재(天災)를 운 좋게 피하여 살아남는다, 이를 계기로 일을 그만두고 도시의 수영 센터 강사가 된다, 바다에서의 끔찍한 경험에 현재의 삶을 잡아먹히지 않도록(“살면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이따금 마주해두는 편이 나아.”) 해변 풍경 포스터를 집에 걸어둔다, ⋯⋯.바다에서 수영장으로, 물의 자연에서 물의 시설로 이직한 셈입니다. 규모와 안전성의 차이가 있기는 할 테지만 바다든 수영장이든 다 같은 ‘물’입니다. 이름에서부터 물(水, 미즈)을 머금은 이 스쿠버 다이버는 어쨌거나 물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가 봅니다.일본어 사전에 ‘사카미즈’를 검색하니 ‘열극수(裂隙水​)’라는 풀이가 나옵니다. ‘지하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동하는 물’을 뜻하는 지질학 용어라고 합니다. 이 낱말을 소설 「물」에 흘려 보낸다면, ‘내게 보이지 않고 내가 어찌할 수도 없는 어떤 거대한 삶의 흐름’ 정도로 여과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바다는 벗어났지만 또다시 물-수영장에서 생업을 이어가야 하는 사카미즈의 처지와 썩 잘 어울립니다. 소설 제목이 ‘바다’가 아니라 「물」인 이유를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독자로서 제가 꼽은 「물」의 백미는 ‘백상아리 이빨’ 에피소드와, 대단원 부분에서 사카미즈가 ‘GH’라는 인물(아마도 인도네시아 해변에서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을)을 회상하는 장면입니다.소설 속에서 몇 차례 언급된 것처럼 백상아리는 인도네시아에서 서식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웬 수상한 노파는 백상아리들의 이갈이 후 해저에 침전된 이빨들을 찾아내라 닦아세웁니다. “비명횡사한 내 아들을 위해서”라는 이유를 대는 걸로 보아 백상아리에게 자식을 잃은 모양입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는’ 듯합니다. 그 바다엔 존재하지도 않는 어종을 ‘아들을 물어 죽인 것’으로 상정한 심리 상태. 이 노파에게 바다의 이미지란 백상아리 혹은 백상아리의 이빨로 남고 만 것이 아닐까요. 노파가 얘기한 사연의 진위 여부는 소설에서 그리 중대하게 다뤄지지 않는데, 저는 이 지점이 「물」의 소설적 아름다움이라고 느꼈습니다. 바다에 이빨이 있다, 바다는 사람을 물어 죽인다, 물이 나를 물었다, 라는 상상력의 확장을 구현하는 장치라서요. 사카미즈가 바다 밑바닥에서 건지려던 ‘이빨’이란 사실, 누구나의 삶을 멋대로 가학하고 사라지지만 아무런 흔적도 실체도 파악되지 않는 ‘불행’인 것입니다. 애초에 형체 없이 닥치는 불행이, 고작 얼마간의 물질로 발견될 리가 만무합니다.「물」의 두 번째 백미는 그 위치 선정 또한 더없이 적절합니다. 하필 소설의 마지막에, 이야기의 끝자락에 스-윽 떠오르듯 나타나는 것입니다. 소설 속 장면을 빌리자면, 마치 파고가 지나간 뒤 해수면 위로 “얼굴을 물속에 박은” “몇 ‘구’”의 사람들이 너울대듯.GH라는 인물 또한 ‘백상아리 노파’만큼이나 수상쩍습니다. 스스로 살인범임을 밝히는데, 이 역시 노파의 백상아리 목격설처럼 진짜인지 아닌지를 따져 물을 성질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카미즈가 그에게 겁을 먹었고, 그리고 그가 사카미즈가 소지하고 있던 백상아리 이빨(‘이것과 똑같은 걸 찾으면 돼’라는 일종의 견본으로 노파에게 받은)을 가져갔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이빨은 또 한 번 사카미즈에게 ‘찾아야 할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물」의 공식을 따르자면 바다-물, 백상아리, GH는 모두 ‘이빨을 가진 존재’이자, 사카미즈 입장에서는 찾아내고 규명해야 할 대상입니다.‘나한테 대체 왜 이런 불행이 닥친 것인가⋯.’이 짧은 탄식이 바다이자 물이고, 백상아리와 GH의 이빨이 아닐까, 하고 감상했습니다. 소설 마지막에 사카미즈가 남긴 다음의 말은 그래서, 바다 같고 물 같습니다. 잠잠한데, 그 밑으로 백상아리가 입을 벌리고 있을지도 모르는.“그런데 그 인간이 거기 어디서 물에 잠겼다면 말이야, 인도네시아 바닥 어딘가에는 정말로 백상아리 이빨이 있겠군그래.”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의 어찌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생활인, 또는 생존자의 소설 속 최후 발언이 이토록 무섭고 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독자로서의 의견입니다만, 사카미즈의 저 말이 없었다면 「물」은 지금보다 얕았을 것 같습니다. 기시 유스케의 「아귀의 논」이나 「푸가」와 같은, ‘마지막 한 방’이 독자의 소설 읽기 감흥을 한껏 끌어올리는, 독자의 긴장을 끝내 풀어주지 않은 채로 (좋은 의미의) 찝찝함을 안기는 이야기였습니다.​ 임재훈
운이 좋아야 하나?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독서를 할 때, 작가의 성숙한 사유 그대로가 위로가 될 때가 있다.운은 무엇인가. 정리할 수는 없지만, 결과에 따라 좋고 나쁨이 정의되는 것은 확실하다. 그게 제아무리 모호하더라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답은 반대의 가능성을 동반한다. 그게 좋은 쪽의 상상이든, 나쁜 쪽의 상상이든, 그 자체는 어둠인지도 모른다고, 이 소설은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걸 그저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 삶인지도 모른다고.<운이 좋았네요>는 사고를 시작으로 긴장감 있게 뻗는 서사와 적절한 반전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단편이었다. 아이의 사건을 중심으로, 그 내막의 가능성을 나열한다. 장인, 아내, 주인공, 장모, 돌보미 등은 서로를 탓하고 있다. 네가 그랬으면, 그때 그랬다면, 하며. 작가는 그런 나열의 공법으로 의식을 뚜렷이 하다가, 반전으로 주제를 관철시킨다. 끝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와 주인공이 동일시되며, 하나의 우아한 이미지로 근사한 형상화를 달성한다.불행을 마주한 인간이라면 이런 수많은 가정의 나열을 경험하지 않은 이가 없을 터이다. 그때 내가 이랬다면, 그때 누가 그랬다면, 하늘이 어땠다면, 운이 좋았다면, 지금이 조금은 나았을까, 하고. 그런 가정은 미련과 다를 바 없이 유해하다. 아이 혹은 트럭 기사의 끝처럼, 인과는 결과에 의존할 뿐이니까.그렇다면 그런 삶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낚싯대를 던져 놓고 앉아 있던 아버지의 이미지가 강렬히 남는다. 그는 정적 속에서 무언가를 헤아리고 있었던 걸까. 그건 어떤 불확실성을 대하는 삶의 태도를 은유하고 있지 않나 가늠해 본다. 운이 좋았다, 운이 나빴다, 로 정리되는 삶이 어디 있는가. 과거 가정의 상상으로 갉아 먹히는 현재를 누가 원하겠는가. 가늠하고, 상상하고, 운 따위로 슬퍼하기에는, 우리 모두 실천하는 삶이 치열하다.끝에는 독자인 나도 주인공 찬영처럼 비로소 궁금해졌다. 어둠 속 아버지가 보던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작가에게 제대로 전달받았다. 배울 수 있었다. 어떤 지나간 불확실성에 의존하기에는 삶은 너무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사실을.아름다운 사유가, 소중한 위로가 아닐 수 없다. 구름
나도 밥먹고 사는 인간입니다 <나도 똑같이 밥 먹고 사는 인간입니다.>        직장인의 애환이 담긴 소설은 처음 읽었다. 참치집 회식을 하는 풍경이나 개개인의 직무에 어울리는 말투와 대화들, 신선하고 잘 읽히고 정말 그럴 것 같아서 히죽 거리며 읽었다.     주인공 유란은 계약직이다. 그녀는 회식에 목숨을 거는 듯 식탐이 있다. 지난 소고기 회식에서 몸무게 내기를 해, 체중계를 챙겨 회식을 향한다는 그 장면도 웃프다.     50만원 내기에서 이긴 유란은 대뱃살 한 점이 남은 상황에서 웃음꺼리가 되어도 스스로를 가오나시라고 하며 먹는다. 그녀에게 그 한 점은 단순한 참치가 아니다. 스스로 먹는 것의 주인이 되어, 누군가가 먹어도 되는 마지막 한 점이라면, 지위고하를 떠나서 먼저 먹겠다는 의지다. 통쾌하다 못해 감동적이었다.     유란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점심은 없습니다, 라는 메모가 분명, 직급의 차이, 사회에서의 불이익 같은 제도의 문제다. 하지만, 내기에서 이긴 사실로 유란의 성공이라고 본다. 점심이라는 의미가 계약직에게 불리한 차별라는 걸 안다. 하지만 대뱃살 한 점을 먹는 유란, 몸무게 다이어트에서 이긴 유란, 나는 그녀가 당당한 삶을 산다고 믿는다.     시대에 뒤쳐진 조직의 제도가 문제지 유란은 결코 뒤처지거나 부족하지 않다. 그녀는 차별 받을 수 없고 억눌러질 수 없는 한 인간인 것이다.     “나도 똑같이 밥 먹고 삽니다.”    유란이 소리치는 소설이다.  후기: 잘 쓴 소설, 재미있는 소설, 뭐라도 좋지만, 소설을 읽고 이렇게 푹 빠져 보긴 오랜만인 듯 합니다. 강추합니다. 혜섬
부딪는 분노와 애도마저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읽은 후 대단히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는 소설이 있다. 막대한 에너지들의 부딪힘, 악의, 슬픔, 열의, 그것에 독자로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어 다음날 혹 그다음 날까지 남는 충격적인 소설, <노적가리 판타지>다.장애가 있는 성불구 동생을 둔 주인공과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동생과 결혼을 약속한 목사의 딸. 둘은 밀회를 즐기다가 동생의 자살을 마주한다. 이 소설은 설정부터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가장 격한 감정과 부딪힘을 내포하고 있다.흥미진진하고도 무서운 서사와 별개로, 작가의 전략은 한 단계 위에 있다. 이런 믿을 수 없을 만큼 비극적인 현실은 이야기이다. 작가는 그런 이야기를 통해 소설이란 환상의 공간으로 독자를 안내하고, 그게 곧 현실이라고 직시하게 만든 뒤, 다시 환상으로 빠져나간다. 소설이기 이전에, 그게 뒤엉켜 사는 인간사이고,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자연이라고, 구조부터 주제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그곳에 깊은 진실이 하나 숨어 있다. 배역. 삶은 그게 어떤 형태이든 다만 흘러가는 것이고, 겪는 것이다. 결론은 없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판타지와 같은 이야기니까. 우리는 어느 삶의 시나리오 속 하나의 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소설은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섬뜩한 질문이 솟아오른다.그렇다면, 소설 속 주인공이 느끼는 애도와 슬픔마저 연기인가?그런 인식에 다다른 순간, 소설의 에너지는 그대로 독자에게 전이된다. 나 역시 그런가. 슬픔을 연기하고 있나. 열의를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쉽게 떨쳐낼 수 없는 이야기의 힘이었다.한데 며칠이 지나고 보니, 이런 비극적 소설이 위로로 다가오는 건 왜일까. 아마 주인공이 ‘옛날에,’ ‘옛날에,’하며 이야기의 공간으로 사라지는 마무리가 이유인 듯하다.어떤 비극도 닥칠 수 있다. 우리는 애도마저 연기해야 하는 끔찍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허나 그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이다. 그 누구도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정의되지 않고, 결말은 없다.없는 결말은 반대로 무한한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비극이든, 행운이든 ‘나’는 흔들릴 이유가 없다. 시나리오는 흘러가는 중이다. 배우가 인물로 인해 아플 이유는 없지 않은가.‘다만 겪는 과정’이라는 미치도록 성숙하고, 성숙하기에 아프기도 한 위로는 진귀한 독서 경험이었다. 츠지
무감각이라는 허방 위에 서 있는 우리에게 싱크홀 사고로 남편 휘를 잃은 주인공은 그와 함께 살기 위한 준비를 했던 시골집에서 홀로 살고 있다.오래되고 위태로운 그 집은 허방 난 도로와 인접해 있어, 큰 차가 허방을 치고 지나갈 때마다 위태롭게 흔들리고 주인공의 일상을 자꾸 흔든다.민원을 부탁한 마을 이장은 '그 곳은 가정집보단 기사 식당 하기 좋다'며, 집을 팔라고 은근히 압박해오는 상황.무심하고 무감각한, 거대한 안전불감증 같은 허방에 흙을 채우고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주인공의 결심을 응원하며 독서를 마쳤다.'그런 어처구니 없는 사고는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남에게만 일어나라는 법도 없다. 유난스럽게 굴지 말자. 다들 이런 사연 하나쯤은 튀어 오르지 않게 눌러두고 별일 아니라는 듯 살아간다. 부서진 얼굴로 휘가 아픔 없이 나를 본다. 아무것도 모른 척 웃는 얼굴을 집게 손가락으로 사납게 문지른다. 잔금이 간 얼굴에서 그날처럼 피가 흐른다.' - 작품 중에서 작품 속에는 우리 사회를 관통한 여러 비극적인 참사들을 나열하며, 그 사건들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유난스럽지 않으려는'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남편 휘를 잃은 주인공의 슬픔과 고통이 어떻게 '유난'이 될 수 있는가. 그걸 스스로 '유난'이라고 자조하며, '다들 이런 사연 하나쯤 눌러두고 별일 아니라는 듯 살아간다'며 스스로를 억누를 수 있는가.주인공이 감당해야 할 현실을 묘사하는 이 문장에서 먹먹해지고 말았다. 담담하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의 태도에서 역설적으로 그 '유난스럽지 않다는 듯 행동하는 사람들'의 무심함과 무감각을 꼬집는 것 같았다.도로에 난 허방에 부딛쳐 오는 차들 때문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집에 사는 주인공의 민원 같은 건 문제도 아니라는 듯 '기사 식당 하면 딱 좋을 자리'라며 집을 팔라고 종용하는 마을 이장 같은 사람들을. 작가는 '언제 갑자기 우리 삶을 푹 꺼지게 만들지 모를 사고들이 정말 남의 일 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균열 속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섬세하게 조명하고 불편과 불통의 감각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마지막, 주인공이 결심하고 움직이는 장면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무감각이라는 허방 안에 서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작가의 메세지를 잘 포착해야 할 것 같다. 허우적거리면서도 끝까지 이야기를 완성해준 작가에게 감사와 존경을 전한다.   박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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