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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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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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농장: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토마스 농장: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주한나 N
  • 단편 당선작
    숲: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숲: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박호연 N
  • 단편 수상작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김설원
  • 단편 당선작
    스며드는 것들: 2024 현진건신인문학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스며드는 것들: 2024 현진건신인문학상 당선작 금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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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의 위상: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달의 위상: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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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저리들의 긴 겨울: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머저리들의 긴 겨울: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이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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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스윙바이: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마지막 스윙바이: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국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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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문장13: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비밀문장13: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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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편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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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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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다른 듯 같은 두 남자의 이야기 마지막 스윙바이는 인간의 고립을 다룬 소설이다. 중력의 방향을 읽은 남자와 주인공의 구도로 목적지 없이 끌려가는, 자기 방향을 잃은 삶을 핍진하게 그려낸다. SF 요소를 섞어 낯설고, 읽는 재미가 크다.   조태훈이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가족을 위해 우주를 부유한 뒤, 늙지 않고 돌아왔다. 돌아와서도 매일 출근한다. 목적지는 없다. 그는 그저 자율주행차 속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탄다. 중력으로 방향을 잃은 미소를 얼굴에 심은 채.   주인공은 그런 중력을 잃은 직원들을 관리하는 인물이다. 그는 비정하다. 소설을 읽고 마음이 끌리는 쪽은 조태훈이다. 그러나 둘 다 공감이 되는 것은 동일하다. 대출에 허덕이며 어쩔 수 없는 일을 하는 주인공도 이해가 된다. 인간은 이따금 비정하고, 배타적이고, 비윤리적이어야 한다.   그런 완전히 반대로 마주 보지만, 같은 고립을 가진 두 인물이 얽히는 흥미진진한 서사를 읽으며,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둘은 내적으로 동일하게 방황한다. 위치만 다를 뿐.   고립이라는 어쩔 수 없는 삶의 요소, 그런 어두운 현실에도, 작가는 희망을 소설에 심어 놓았다. 우리는 이타적인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게 설령 마지막이 되더라도, 서로를 기억해야 한다. 고립을 해소하기 위해서.   이렇게 현실적인 SF적 소설이 참신하고 무척 반가웠다.  minimum
커피 맛집처럼, 작법 맛집이네요   처음 "인생작법"을 읽고 든 생각이 "인생맛집이다!"였다. 작법은 이렇게 하는구나, 소설은 이렇게 창작하는 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작법의 교과서 같다는 생각만으로 그칠 수 없는 묘한 끌림이 있었다. 다시 읽었다. 두 번을 읽고 나서는 후기를 남겨보기로 마음 먹었다. 카톡을 하거나 이모티콘이나 날리는 등의 댓글 이외에 어휘나 문장을 남겨야 하는 것에 자신이 없고, 스스로 기록에 대해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썼다 지우기만 하는 한 사람으로 살다가 무슨 용기인지 이렇게 후기를 적는다. 의미를 붙이기는 부끄럽지만, 나름 유의미한 도전 같은 것을 해보기로 한다.   같은 글을 읽어도 사람마다 다르게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박상우 작가의  "인생작법"을 읽고 공통으로 느낄 수 있는 한가지는 분명할 것이다. 과연 "인생은 창조자에 의해 정해져 있는가."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그렇다 한 들, 그렇지 않고 운명을 거스런다 한 들, 뭐가 의미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인생이란 그야말로, 그대로 두면 되는 자연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니까. 결국, 나는 운명론자니 아니니 하는 것도 우스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혈액형 뭐예요? 혹은 mbti 뭐예요? 하는 것처럼.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커피 맛집을 찾아다닌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맛있는 소설을 찾아 읽는다. "인생작법"은 그런 맛집이다. 나는 가끔 글을 아껴가면서 읽는다. 다시 읽던 그 페이지로 달려가기를 기다리는 시간, 그 설렘을 즐긴다. 인생작법은 그 반대로 책을 읽다가 멈출 수 없다. 한달음에 내달린다. 하지만, 여운이 길다. 길다 못해 계속 생각하게 되고 그 생각이 결국, 나의 인생관처럼, 어느 지점에 도달한다. 오늘도 우리는 인생 맛집 같은 작품을 찾아 헤매고 소설 같은 인생을 또 살아 볼 것이다.   용기는 내면 낼 수록 더 나는 모양이다. 솔직히, 이 작품을 읽으면서, 폭풍우에 운전을 하는 차 안에 있은 경험이 떠올랐다. 그와 나는 이별 여행을 떠난 참이없고, 그 기억을 되짚어 보니, 그땐 왜 날씨를 미리 찾아보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었다. 이국에서의 생활이었는데,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이제 만남을 끝내기로 하고 여행을 떠난 날이었다. 이국이니까 가능했지, 한국이었으면, 포장마차에 소주 한잔 걸치면서 죽일놈 살릴 니은 하면서 싸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폭풍우를 뚫고 목적지에 도착했으나, 정말 그 뒤로는 암흑 속 꿈처럼 아무것도 기억에 없다. 얼마나 긴장을 하고 죽음과 가까웠는지. 오직 이 폭풍우를 뚫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가 잠시라도 운전을 잘못하면, 바로 죽음, 이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이 그 이후의 기억을 앗아갔다. 우리는 헤어졌고, 지금은 기억을 더듬어야 겨우 기억이 날까 말까 하는 추억이 되었다. 불멸의 명작은 누군가의 추억을 고스란히 소환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영감 덕분에 새로운 인생이 펼쳐 지기도 할테지. 간혹, 커피 맛집이나 인생 맛집 같은 인생으로.혜섬
한 편의 영화로 읽는 팔월극장 엄마가 숨을 거둔 시간에 나는 클럽 디디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솔직히 첫 문장부터 좀 막히는 지점이 있었다. 몰입이 안 된다라기 보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소 소설에 진입이 되지 않았다. 그런 의문점을 갖고 소설을 읽어내려갔다. 그러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부족하나마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시점의 문제와 연결되어 보인다.  팔월 극장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흔히 접하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과는 사뭇 결이 다른 것처럼 여겨진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소설 속에서 일인칭 주인공으로서 기능하는 것과 동시에, 소설 밖에서 비춰지는 카메라 감독의 기능을 동시에 갖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만일, 그러하다면 첫 문장에 진입할 때 가져야 할 시선은, 흔한 일인칭 시점보다 한참 뒤로 물러나야 하는 게 맞을 듯싶다. 읽는 독자가 시선을 주인공에 맞추기보다, 한발 물러나 소설 밖에서 소설을 비추는 (보이지 않는)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얻는 효과는, 철저한 객관성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토록 철저하게 객관성을 계산하고 유지하려 했을까? 부족하나마, 나름 짐작해 보기로는 아마도 그것이 주제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유추해본다. 사실, 자살이라는 소재는 다소 무겁고 어두운 주제이다. 자칫 거리두기가 실패할 경우, 대책 없는 감상에 빠지거나, 밑도 끝도 없이 독자를 끌어내릴지 모른다.  그런데 팔월극장에서는 그런 면에서, 시점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일관성을 유지한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자신을 대상으로 한 편의 영화를 찍는 중이다.  그렇게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어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 소설이 비추는 장면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작동되기 시작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의 시놉시스와도 같다. 마치 영화를 보듯 각 장면을 따라가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샐러리맨 장면이 가장 좋았다.  샐러리맨 장면은 마치, 사형수가 집행 직전에 마지막으로 담배 한 개비를 피우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자살을 결심한 주인공에게 생의 마지막 순간에 주어진 유예의 시간, 주인공은 샐러리맨 곁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가방에 든 수면제와 내면에 계획된 자살이 그 순간만큼은 사라지고 없다. 주인공은 찰나의 희망을 누린다. 바로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는 윤희를 만나기 직전에 안경 렌즈를 교체하는데, 그것은 삶에 대한 시선이 본격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이처럼 작가가 군데군데 심어놓은 떡밥들을 찾아가는 과정이 소설적 긴장감을 더해주었다.  팔월 극장이라는 메타포도 좋았다. 이것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 확장되어 보편성을 갖는다. 이처럼 아픈 시대적 상황을 담아내면서도 치우침이 없다. 시점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주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또한 주제를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는지, 단편의 묘미를 제대로 느끼게 해 준 좋은 작품이었다.  부족하지만, 리뷰를 적어본다. 좋은 작품에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솔트
새빨간 푸에고 로사만의 한 걸음 푸에고 로사라는 화려한 제목은, 표지의 색감은, 섬세하게 묘사되는 푸에고 꽃집의 정경은, 전부 이 소설의 낯선 아우라에 기여한다.   인간은 누군가에 기대어 세상에 나오지만, 성장을 위해 직접 어딘가 다른 곳에 뿌리 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꿈과 젊음, 좋아하는 마음 정도로는 부족한 세상이다. ‘자유롭다’는 개념만으로는 개성이 될 수 없고, 자기 꿈만 쫓겠다는 주인공은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주지 못한다.   푸에고 로사도 성장소설이다. 허나 여타 성장소설과는 다르다, 주인공의 성장은 플로랄 폼, 플로리스트의 손과 발의 의지, 주변의 도움 정도로 처리되지 않는다. 작가는 한 단계 이상의 성장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모두가 가진 유일무이한 토양, 바로 ‘이름’을 통해서이다. 이 소설의 가치는 ‘푸에고 로사’라는 세상에 하나뿐인 이름에서 나온다.   작가는 주인공을 성장시키지 않았다. 승화시켰다. 모두가 가진 이름, 하나뿐인 이름, 내게만 주어진 이름을 통하여.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고 나아가는 주인공의 첫 발걸음은, 그저 무모한, 짧은 울림에 의한 성장이 아니다. 푸에고 로사로서의, 주인공‘만’의 한 걸음이다.   커다란 울림으로 끝나는 이 소설을 통해, 독자로서 나만의 한 걸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구름
삶에서 예술은 왜 필요할까 이 소설에는 소설을 창작하고 가르치는 AI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소설의 배경인 미래, AI가 예술 창작의 온전한 주체가 되었을 때를 상상해 본다. 예측컨대, AI와 인간의 예술은 별도의 장르로 구분될 것이다. 작가는 인간이 쓰는 소설을 휴먼 장르라 상정했다.  주인공 AI는 인간을 대상으로 소설을 가르친다. 인간이 창작한 소설은 소위 휴먼 장르에 속한다. 주인공 관점에서 인간의 소설은 AI의 창작 알고리즘 내에서 모두 예측이 가능한 설정과 주제일 뿐이다. 더 이상의 낯섦과 새로움이란 없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철저한 거리 두기를 통해, 주인공인 AI의 입장에서 소설(예술)을 향한 인간의 처절한 고뇌를 마주할 수 있었다.  휴먼 장르에 목을 매는 인간들은 말 그대로 후지다. 인간이 창작한 소설은 전혀 낯설지 않다. 자신들의 감성에서 추출했다고 하지만. 너무 유치하고, 너무 지루하고, 너무 징징거린다. 작가든, 독자든, 습작생이든 마찬가지다. 오롯이 인간의,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쓰인, 휴먼 장르라는 소설 또한 후지다. 인간들은 감성 운운하며 종이책을 고수한다. 정말 골동품 같은 존재들이다.  대충 이러하다. 웃프지만 조목조목 반박할 수만은 없다. 그런데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인간 본연의 ‘후짐’이 반전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아마, 소설을 창작하는 ‘주체’에 대한 역발상으로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체의 비틀림은, 주체가 소유한 언어에 대한 비틀림으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언어는 무엇인가? 소설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예술은 무엇인가? 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예술을 하던 AI가 요리하는 AI로 기능을 달리하는 부분이었다. 이 지점은 마치 환생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삶과 예술에 대한 절묘한 지점을 잘 묘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설정으로부터 어떤 경로를 거쳐 심도 있는 주제로 나아가는지. 한편 독자에게 재미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고심했는지가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무엇보다 언어를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다. 창작자로서 언어를 생산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담겨 많은 공감이 갔다.  삶에서 예술은 왜 필요할까?  이러한 화두는 결말에 이르러 무한 확장되기에 이른다. 개인적으로는, 글 전반에 던져진 화두가 결말 부분에서 좀 더 수렴되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AI라기보다 한 개체에 가까운 존재의 예술적 세계관을 엿보게 되었으니, 그것이 그러한 한 존재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필연적 요소를 갖는지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좋은 소설이었다.  솔트
올 것은 오겠지만, 제목부터 강렬하다. 주인공의 직업은 낯설다. 배경은 이국의 세상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실존적 문제를 담고 있다. 아니키도, 선생도, 아닌 ‘우에다’이고 싶었던 주인공은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자기 실존을 지키려는 노력, 긍지를 놓지 않겠다는 열정은, 어쩌면 처음부터 의미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터무니없고, 무자비하다. 끔찍한 정황은 결과에 불과할 수도, 썩 괜찮아 보이는 결과는 한낱 정황에 불과할 수도 있다. 깨끗한 물도 전부 불순물이 섞였고, 완전한 것은 없다. 이런 불합리하고도 불안정한 세상 속, 끝나는 것은 애석하게도 인간뿐이다.   그럼에도 주인공 우에다가 자포자기한, 모든 게 끝난 인간처럼 보이는가 묻는다면, 완전히 그렇지는 않다. 주제는 현실적이고, 파멸적이되, 작가의 의식만은, 가녀린 희망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에다는 자기 수요를 받아들인, 존재가 거세된 인간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여전히 놓지 않고 있다. 휴에게 전하는 조언,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노력, 여전히 ‘변덕’을 고수함으로 벌어진 아내와의 이혼 등은 ‘올 것이 와버린’ 우에다가 여전히 섭리에 반하는 변덕을 부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존재는 없는지도 모른다. 작품이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는 우에다는 받아들였다. 그리고 필히 모두에게 올 것은 올 터이다. 즐기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되어 버릴 터이다. 그럼에도 놓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닐까. 마지막 비디오에 본명을 넣은 야마다 유우코처럼. 뭐든 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에다가 여전히 마담의 스낵바에 가듯이. minimum
씁쓸한 어른의 삶의 단단한 공분모 작가는 어른을 보호하는 아이를 그려 보고 싶다고 말한다. 발상부터 무척이나 낯설다. 그런 낯설고도 강인한 이미지를 위해 대단한 인물이 탄생했다. 지진광이 일어났을 때 태어난 아이, 퍼즐처럼 붕괴와 재구축 개념이 공존하는 아이, 머무르는, 좌절한 어른과 다르게 미래를 꿈꾸는, 어른을 안아줄 수 있는 아이. 소설의 주인공 왕곤이다.   남녀는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피해자 모임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런 ‘붕괴’의 현장에서도 재구축은 이루어졌다. 사랑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주인공 왕곤은, 신파적인 캐릭터-즉 비운의 부모를 더욱 파괴시키는 상투적인 딸-가 아닌, 시차가 바뀌었어도 부부의 공분모로 존재하는, 위험에 처한 아이들을 돕는, 선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성장한다. 곤은 힘든 일이 있어도 퍼즐을 맞추고 평정을 유지하며, 벌하더라도 보상하는 아이이다.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으로 곤이라는 인물이 완성된다. 그곳에서 독자로서 목도할 수 있던 것은 낯선 보살핌과 잔잔한 위로였다. 붕괴와 재구축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주제의식, 지진처럼 커다란 재앙이 닥쳐도 빛은 존재한다는, 또 앞으로도 하리라는 위로가 지진광처럼 오묘하게 발광한다.   아이를 재앙처럼 여기는 요즘, 꼭 필요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여러 의미로 어른을 보호할 것이다. 어쩌면 언제나 그랬다. 구름
흑인은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다   김솔 작가가 쓰는 소설은 그냥 소설이 아니다. 독자와 단순하게 소통하는 보통의 소설이라고 하기에 그의 소설은 너무 독자적이고 독창적이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는 “김솔은 태어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쓴다”고 했다. 태어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쓴 소설이니 당대 독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소설이라는 말은 하나 마나 한 것이 된다. 요컨대 쉽게 잘 읽히는 소설에 길들여진 독자들은 김솔 작가의 소설에서 까나리액젓 맛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김솔 표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이 세상 어떤 소설 맛과도 비견할 수 없는 독창적인 맛을 느낄 것이다.   「고독한 순환을 즐기는 검은 유체」는 17살에 갑자기 흑인이 된 H의 이야기이다. H는 의사에게 유전자를 바꿀 수 없느냐고 묻지만 의사는 집에 가서 샤워하고 자라고 응대한다. 결국 17살에 흑인이 된 이 소년은 진정한 흑인으로 존중받기 위한 10가지 조건을 인지하고 현실을 받아들인다. 흑인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인식을 극복할 수 없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누가 흑인인가.    이 소설은 단지 피부가 까만 흑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완전하게 뒤덮고 있는 억압과 부조리, 지배와 피지배의 불가항력적 구조에서 탄생하는 흑인들에 관한 처참하고 섬뜩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태어난 게 아니라 만들어진 흑인 H가 단지 H에서 멈추지 않는 이야기, 그러니까 이 소설은 당신과 내가 사는 세상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당신과 나의 이야기이다.   얼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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