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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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농장: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토마스 농장: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주한나
  • 단편 당선작
    숲: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숲: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박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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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김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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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며드는 것들: 2024 현진건신인문학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스며드는 것들: 2024 현진건신인문학상 당선작 금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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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의 위상: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달의 위상: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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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저리들의 긴 겨울: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머저리들의 긴 겨울: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이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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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스윙바이: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국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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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문장13: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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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문장7: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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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편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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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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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만일, 남편이 키메라로 변하지 않았더라면 바야흐로 장르의 전성시대이다. 본격 소설을 위시하여, 판타지, SF뿐만 아니라, 보고서, 다큐멘터리 형식을 소설적 장르로 차용하기도 한다. 춘추전국시대처럼, 이러한 장르 팽창 현상은 왜 갈수록 진화를 거듭하는 것일까.  소설에서 이처럼 다양한 장르가 적극적으로 차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은 활자 예술로써 인간의 언어를 전제 조건으로 한다. 하지만 그간 인간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언어는 더 이상 인간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총체적인 언어 모델의 관점에서 보자면, AI의 언어 모델 또한 그러한 총체성에 기여한다. 즉,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모델이 AI에게 적용되며,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언어 모델이 창출되며, 그것이 역으로 인간의 언어 모델에 적용되어진다. 흔히,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인터넷상의 모든 언어가 그러한 언어 모델의 범주에 속한다. 이로 인해 인간의 의식은 보다 세분화된 차원으로 확장된다. 정교한 언어와 의식에 갇힌, 진실에 이르는 길은 좀 더 다양한 차원의 낯선 전략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현재 소설의 장르 팽창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어떤 진실에 이르기 위해, 작가는 모험을 감수하고 자기 앞에 놓인 수백수만 가지의 갈래길 앞에서 고군분투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소설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객체가 되고, 그것이 전략적으로 택한 길은 하나의 형식이 된다.  정상에 이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저절로 열리는 ‘낯선 길’, 그렇게 ‘스스로 열린’ 길 앞에서, 작가는 낯선 두려움에 맞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현시대의 작가들에게 주어진 사명과도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대단한 사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언어 하나만을 통해, 길이 끊어진 시공간에 지극히 사소한 푯대 하나를 꽂는 행위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독자는 재미와 의미라는 두 가지 소통의 키워드를 제공받으며, 이를 통해 독자 또한 언어적 사명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박은비 작가의 세 번째 신작을 읽었다. 이 소설은 남편이 키메라로 변신하는 내용이다. 리뷰에 앞서, 다소 장황하게 장르를 언급하는 이유는 작가가 차용하는 장르가 이러한 점에서 재미와 의미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놓치지 않고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은비 작가의 당선작인 <창>과 <아직 아닐 거라는 착각>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매우 쉽게 잘 읽힌다는 것이다. 하지만 쉽다는 의미가 곧 쉽게 쓰여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두 작품 모두 가족사를 다룬다. 대외적으로 큰 사건 사고들이 많은 시대이다. 그로 인한 사회적 소통의 부재와 단절은 각 개인의 몫이다. 두 작품 모두 가족사를 다루지만 그것은 가족 내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이 속한 공동체와 밀접한 연결고리를 갖는다. 그러한 연결고리를 통해 작가는 한 개인과 가족, 더 나아가 사회와의 소통의 부재를 장면으로 보여준다.  그 방식에 있어서 작가는 자신만의 장르를 펼쳐 보인다. 흔히 판타지 형식으로 불리지만, 박은비 작가의 작품은 현실에 보다 미세한 초점을 두고 있다. 대개 판타지가 보여주는 상상력이라는 것이 극대화된 망원경일 경우가 많다면, 작가가 보여주는 상상력은 보다 미세한 현미경에 가깝다. 그로 인해, 우리는 주인공의 내면에 쉽게 공감을 할 수 있으며, 낯선 이해의 지점에 서서 각자의​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 작품 속에서 ‘낯설게 열린 길’로 저절로 동참하게 된다. 작품 속에서 남편이 키메라로 변신해야 하는 이유이다.  낯선 상상력과 더불어 쉽고 재밌게 잘 읽히는 소설. 독자를 복잡한 미궁에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선명한 의미와 재미를 제공하는 소설. 복잡한 세상 속에서 이보다 더한 소통의 미덕이 있을까. 머리 아픈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힐링할 시공간을 제공해주는,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까닭이다.  솔트
한 편의 극처럼 완성된 청춘 팔월극장은 청춘의 꿈에 대한 소설이다. 실제 있었던 ‘팔월극장’이라는 제목으로, 슬피 완성되어 버린, 그래서 더욱 아픈 이야기이다.   소설을 내적으로 또 외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상징들이 잘 배치되었고, 촘촘하다. 기본기가 무척 탄탄한 작품이다. 청춘의 꿈의 좌절이란 주제, 자살 시도, 여전히 꿈꾸는 인물로의 빠져나가기, 그럼에도 그 모든 걸 아름답게 묘사하는 작가정신, 흔한 이야기지만, 밀도 높고, 소설 속 상징과 이미지들이 좋다. 실제 극장의 이름을 제목으로 하여 잘 응집되고, 중심성이 선명하다. 그런 극장의 역사를 주인공의 현재와 중첩하여, 시대를 아우른다, 혹은 이월한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고스톱 게임, 라운드1,2, 시놉시스, 시나리오 등으로 서술하며, 주인공의 삶 자체를 하나의 시놉시스, 작품으로 형상하기도 한다. 그게 작가의 자의식과도 연결되는 치밀한 계산은 소름이 돋기까지 한다.   주인공은 어머니가 죽은 것을 발단으로, 부서져가던 꿈을 선명히 느끼고, 자살을 결심한다. 여동생의 회유, 그리고 종교로 꿈의 포기에 대한 유혹이 나타나지만 거절한다. 그리고 살림살이를 줄이고, 윤희를 섭외하는 등 세세히 자살 시나리오를 짜고, 실행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샐러리맨 조형물과의 대화, 엄마가 좋아하던, 살맛나는 딸기, 팥죽, 돋보기안경 선물, 자기 때문에 엄마가 일찍 죽었다는 죄책감 등으로 주인공의 연약하고, 순수하고 선한 속마음이 형상화된다. 그러면서도 윤희라는, 여전히 꿈을 꾸고, 열성정인 인물을 이 극의 관객으로 남김으로서, 다음을 독자에게 넘긴다.   작가는 치밀하게 소설 전체를 계산해 두었다. 절제된 여러 소도구는 마지막 아름다운 장면에 모여든다. 머릿속 그려지는 이미지가 너무나 아름답다. <팔월극장>, 하나의 작품은 소설의 끝에 완성된다. 그걸로 청춘의 꿈의 암울함, 동시에 찬란함과 경쾌함이 부각된다.   ‘엄마가 숨을 거둔 시간에, 나는 클럽 디디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이 첫 문장에 소설이 전부 담겼다. 구름
유토피아를 찾아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현실같은 상상의 세계>  토마스 농장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디스토피아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계에서 나는 60층 수직 농장 39층에 여자들과 함께 생활한다. 여자들은 미스터 조의 감시 아래 식량과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끔찍한 생활을 견뎌내고 있다. 내가 어린 시절 할머니 댁으로 가는 길에 대한 추억담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어 댔을 뿐인데, 어린 연우에게 나를 잘 따르는 계기가 되었다.  작품의 중심 서사는 연우가 사라지고 시작된다. 미스터 조는 어린 딸의 죽음으로 연우에게 특별한 마음이 있었고 연우의 사라짐은 그를 분노하게 만든다. 내게 가해지는 폭행으로 잃어버린 수치심을 회복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토마스 농장에서 살자온 것인지 스스로 혼란스럽다.  도입부가 강렬한 토마스 농장은 한편의 영화처럼 생생하다. 작가의 상상력이 뛰어나고 독자로 하여금 몰입하게 하는 흡입력이 대단하다. 결말을 읽고 나면 여운이 길다. 좀처럼 보기 드문, 독특한 서사와 인물들에 감탄한다. 이제 그곳에서 주인공은 연우에게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을 것만 같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너무 기다려진다.   고백하건데, 리뷰에 초보인 나는 이 작품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혜섬
다른 듯 같은 두 남자의 이야기 마지막 스윙바이는 인간의 고립을 다룬 소설이다. 중력의 방향을 읽은 남자와 주인공의 구도로 목적지 없이 끌려가는, 자기 방향을 잃은 삶을 핍진하게 그려낸다. SF 요소를 섞어 낯설고, 읽는 재미가 크다.   조태훈이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가족을 위해 우주를 부유한 뒤, 늙지 않고 돌아왔다. 돌아와서도 매일 출근한다. 목적지는 없다. 그는 그저 자율주행차 속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탄다. 중력으로 방향을 잃은 미소를 얼굴에 심은 채.   주인공은 그런 중력을 잃은 직원들을 관리하는 인물이다. 그는 비정하다. 소설을 읽고 마음이 끌리는 쪽은 조태훈이다. 그러나 둘 다 공감이 되는 것은 동일하다. 대출에 허덕이며 어쩔 수 없는 일을 하는 주인공도 이해가 된다. 인간은 이따금 비정하고, 배타적이고, 비윤리적이어야 한다.   그런 완전히 반대로 마주 보지만, 같은 고립을 가진 두 인물이 얽히는 흥미진진한 서사를 읽으며,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둘은 내적으로 동일하게 방황한다. 위치만 다를 뿐.   고립이라는 어쩔 수 없는 삶의 요소, 그런 어두운 현실에도, 작가는 희망을 소설에 심어 놓았다. 우리는 이타적인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게 설령 마지막이 되더라도, 서로를 기억해야 한다. 고립을 해소하기 위해서.   이렇게 현실적인 SF적 소설이 참신하고 무척 반가웠다.  minimum
커피 맛집처럼, 작법 맛집이네요   처음 "인생작법"을 읽고 든 생각이 "인생맛집이다!"였다. 작법은 이렇게 하는구나, 소설은 이렇게 창작하는 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작법의 교과서 같다는 생각만으로 그칠 수 없는 묘한 끌림이 있었다. 다시 읽었다. 두 번을 읽고 나서는 후기를 남겨보기로 마음 먹었다. 카톡을 하거나 이모티콘이나 날리는 등의 댓글 이외에 어휘나 문장을 남겨야 하는 것에 자신이 없고, 스스로 기록에 대해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썼다 지우기만 하는 한 사람으로 살다가 무슨 용기인지 이렇게 후기를 적는다. 의미를 붙이기는 부끄럽지만, 나름 유의미한 도전 같은 것을 해보기로 한다.   같은 글을 읽어도 사람마다 다르게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박상우 작가의  "인생작법"을 읽고 공통으로 느낄 수 있는 한가지는 분명할 것이다. 과연 "인생은 창조자에 의해 정해져 있는가."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그렇다 한 들, 그렇지 않고 운명을 거스런다 한 들, 뭐가 의미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인생이란 그야말로, 그대로 두면 되는 자연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니까. 결국, 나는 운명론자니 아니니 하는 것도 우스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혈액형 뭐예요? 혹은 mbti 뭐예요? 하는 것처럼.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커피 맛집을 찾아다닌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맛있는 소설을 찾아 읽는다. "인생작법"은 그런 맛집이다. 나는 가끔 글을 아껴가면서 읽는다. 다시 읽던 그 페이지로 달려가기를 기다리는 시간, 그 설렘을 즐긴다. 인생작법은 그 반대로 책을 읽다가 멈출 수 없다. 한달음에 내달린다. 하지만, 여운이 길다. 길다 못해 계속 생각하게 되고 그 생각이 결국, 나의 인생관처럼, 어느 지점에 도달한다. 오늘도 우리는 인생 맛집 같은 작품을 찾아 헤매고 소설 같은 인생을 또 살아 볼 것이다.   용기는 내면 낼 수록 더 나는 모양이다. 솔직히, 이 작품을 읽으면서, 폭풍우에 운전을 하는 차 안에 있은 경험이 떠올랐다. 그와 나는 이별 여행을 떠난 참이없고, 그 기억을 되짚어 보니, 그땐 왜 날씨를 미리 찾아보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었다. 이국에서의 생활이었는데,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이제 만남을 끝내기로 하고 여행을 떠난 날이었다. 이국이니까 가능했지, 한국이었으면, 포장마차에 소주 한잔 걸치면서 죽일놈 살릴 니은 하면서 싸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폭풍우를 뚫고 목적지에 도착했으나, 정말 그 뒤로는 암흑 속 꿈처럼 아무것도 기억에 없다. 얼마나 긴장을 하고 죽음과 가까웠는지. 오직 이 폭풍우를 뚫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가 잠시라도 운전을 잘못하면, 바로 죽음, 이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이 그 이후의 기억을 앗아갔다. 우리는 헤어졌고, 지금은 기억을 더듬어야 겨우 기억이 날까 말까 하는 추억이 되었다. 불멸의 명작은 누군가의 추억을 고스란히 소환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영감 덕분에 새로운 인생이 펼쳐 지기도 할테지. 간혹, 커피 맛집이나 인생 맛집 같은 인생으로.혜섬
한 편의 영화로 읽는 팔월극장 엄마가 숨을 거둔 시간에 나는 클럽 디디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솔직히 첫 문장부터 좀 막히는 지점이 있었다. 몰입이 안 된다라기 보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소 소설에 진입이 되지 않았다. 그런 의문점을 갖고 소설을 읽어내려갔다. 그러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부족하나마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시점의 문제와 연결되어 보인다.  팔월 극장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흔히 접하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과는 사뭇 결이 다른 것처럼 여겨진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소설 속에서 일인칭 주인공으로서 기능하는 것과 동시에, 소설 밖에서 비춰지는 카메라 감독의 기능을 동시에 갖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만일, 그러하다면 첫 문장에 진입할 때 가져야 할 시선은, 흔한 일인칭 시점보다 한참 뒤로 물러나야 하는 게 맞을 듯싶다. 읽는 독자가 시선을 주인공에 맞추기보다, 한발 물러나 소설 밖에서 소설을 비추는 (보이지 않는)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얻는 효과는, 철저한 객관성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토록 철저하게 객관성을 계산하고 유지하려 했을까? 부족하나마, 나름 짐작해 보기로는 아마도 그것이 주제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유추해본다. 사실, 자살이라는 소재는 다소 무겁고 어두운 주제이다. 자칫 거리두기가 실패할 경우, 대책 없는 감상에 빠지거나, 밑도 끝도 없이 독자를 끌어내릴지 모른다.  그런데 팔월극장에서는 그런 면에서, 시점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일관성을 유지한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자신을 대상으로 한 편의 영화를 찍는 중이다.  그렇게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어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 소설이 비추는 장면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작동되기 시작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의 시놉시스와도 같다. 마치 영화를 보듯 각 장면을 따라가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샐러리맨 장면이 가장 좋았다.  샐러리맨 장면은 마치, 사형수가 집행 직전에 마지막으로 담배 한 개비를 피우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자살을 결심한 주인공에게 생의 마지막 순간에 주어진 유예의 시간, 주인공은 샐러리맨 곁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가방에 든 수면제와 내면에 계획된 자살이 그 순간만큼은 사라지고 없다. 주인공은 찰나의 희망을 누린다. 바로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는 윤희를 만나기 직전에 안경 렌즈를 교체하는데, 그것은 삶에 대한 시선이 본격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이처럼 작가가 군데군데 심어놓은 떡밥들을 찾아가는 과정이 소설적 긴장감을 더해주었다.  팔월 극장이라는 메타포도 좋았다. 이것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 확장되어 보편성을 갖는다. 이처럼 아픈 시대적 상황을 담아내면서도 치우침이 없다. 시점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주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또한 주제를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는지, 단편의 묘미를 제대로 느끼게 해 준 좋은 작품이었다.  부족하지만, 리뷰를 적어본다. 좋은 작품에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솔트
새빨간 푸에고 로사만의 한 걸음 푸에고 로사라는 화려한 제목은, 표지의 색감은, 섬세하게 묘사되는 푸에고 꽃집의 정경은, 전부 이 소설의 낯선 아우라에 기여한다.   인간은 누군가에 기대어 세상에 나오지만, 성장을 위해 직접 어딘가 다른 곳에 뿌리 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꿈과 젊음, 좋아하는 마음 정도로는 부족한 세상이다. ‘자유롭다’는 개념만으로는 개성이 될 수 없고, 자기 꿈만 쫓겠다는 주인공은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주지 못한다.   푸에고 로사도 성장소설이다. 허나 여타 성장소설과는 다르다, 주인공의 성장은 플로랄 폼, 플로리스트의 손과 발의 의지, 주변의 도움 정도로 처리되지 않는다. 작가는 한 단계 이상의 성장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모두가 가진 유일무이한 토양, 바로 ‘이름’을 통해서이다. 이 소설의 가치는 ‘푸에고 로사’라는 세상에 하나뿐인 이름에서 나온다.   작가는 주인공을 성장시키지 않았다. 승화시켰다. 모두가 가진 이름, 하나뿐인 이름, 내게만 주어진 이름을 통하여.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고 나아가는 주인공의 첫 발걸음은, 그저 무모한, 짧은 울림에 의한 성장이 아니다. 푸에고 로사로서의, 주인공‘만’의 한 걸음이다.   커다란 울림으로 끝나는 이 소설을 통해, 독자로서 나만의 한 걸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구름
삶에서 예술은 왜 필요할까 이 소설에는 소설을 창작하고 가르치는 AI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소설의 배경인 미래, AI가 예술 창작의 온전한 주체가 되었을 때를 상상해 본다. 예측컨대, AI와 인간의 예술은 별도의 장르로 구분될 것이다. 작가는 인간이 쓰는 소설을 휴먼 장르라 상정했다.  주인공 AI는 인간을 대상으로 소설을 가르친다. 인간이 창작한 소설은 소위 휴먼 장르에 속한다. 주인공 관점에서 인간의 소설은 AI의 창작 알고리즘 내에서 모두 예측이 가능한 설정과 주제일 뿐이다. 더 이상의 낯섦과 새로움이란 없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철저한 거리 두기를 통해, 주인공인 AI의 입장에서 소설(예술)을 향한 인간의 처절한 고뇌를 마주할 수 있었다.  휴먼 장르에 목을 매는 인간들은 말 그대로 후지다. 인간이 창작한 소설은 전혀 낯설지 않다. 자신들의 감성에서 추출했다고 하지만. 너무 유치하고, 너무 지루하고, 너무 징징거린다. 작가든, 독자든, 습작생이든 마찬가지다. 오롯이 인간의,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쓰인, 휴먼 장르라는 소설 또한 후지다. 인간들은 감성 운운하며 종이책을 고수한다. 정말 골동품 같은 존재들이다.  대충 이러하다. 웃프지만 조목조목 반박할 수만은 없다. 그런데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인간 본연의 ‘후짐’이 반전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아마, 소설을 창작하는 ‘주체’에 대한 역발상으로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체의 비틀림은, 주체가 소유한 언어에 대한 비틀림으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언어는 무엇인가? 소설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예술은 무엇인가? 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예술을 하던 AI가 요리하는 AI로 기능을 달리하는 부분이었다. 이 지점은 마치 환생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삶과 예술에 대한 절묘한 지점을 잘 묘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설정으로부터 어떤 경로를 거쳐 심도 있는 주제로 나아가는지. 한편 독자에게 재미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고심했는지가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무엇보다 언어를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다. 창작자로서 언어를 생산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담겨 많은 공감이 갔다.  삶에서 예술은 왜 필요할까?  이러한 화두는 결말에 이르러 무한 확장되기에 이른다. 개인적으로는, 글 전반에 던져진 화두가 결말 부분에서 좀 더 수렴되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AI라기보다 한 개체에 가까운 존재의 예술적 세계관을 엿보게 되었으니, 그것이 그러한 한 존재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필연적 요소를 갖는지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좋은 소설이었다.  솔트
올 것은 오겠지만, 제목부터 강렬하다. 주인공의 직업은 낯설다. 배경은 이국의 세상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실존적 문제를 담고 있다. 아니키도, 선생도, 아닌 ‘우에다’이고 싶었던 주인공은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자기 실존을 지키려는 노력, 긍지를 놓지 않겠다는 열정은, 어쩌면 처음부터 의미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터무니없고, 무자비하다. 끔찍한 정황은 결과에 불과할 수도, 썩 괜찮아 보이는 결과는 한낱 정황에 불과할 수도 있다. 깨끗한 물도 전부 불순물이 섞였고, 완전한 것은 없다. 이런 불합리하고도 불안정한 세상 속, 끝나는 것은 애석하게도 인간뿐이다.   그럼에도 주인공 우에다가 자포자기한, 모든 게 끝난 인간처럼 보이는가 묻는다면, 완전히 그렇지는 않다. 주제는 현실적이고, 파멸적이되, 작가의 의식만은, 가녀린 희망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에다는 자기 수요를 받아들인, 존재가 거세된 인간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여전히 놓지 않고 있다. 휴에게 전하는 조언,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노력, 여전히 ‘변덕’을 고수함으로 벌어진 아내와의 이혼 등은 ‘올 것이 와버린’ 우에다가 여전히 섭리에 반하는 변덕을 부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존재는 없는지도 모른다. 작품이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는 우에다는 받아들였다. 그리고 필히 모두에게 올 것은 올 터이다. 즐기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되어 버릴 터이다. 그럼에도 놓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닐까. 마지막 비디오에 본명을 넣은 야마다 유우코처럼. 뭐든 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에다가 여전히 마담의 스낵바에 가듯이. minim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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